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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25

25. Always 2

단체복 차림의 군무는,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될 터였다.


흰 셔츠에 타이를 매고, 회색 블레이저를 걸쳤다. 왼편 깃에는 왕관 모양 배지를 달았다.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프로그램 제작에 협찬한 한 교복 업체에서 만든 이 옷은, 사실은 스쿨룩 같은 것도 아닌 그냥 ‘교복’이었다. 숱하게 입던 그 교복.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입는 이 옷은 가끔 신성하고 엄숙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오늘의 센터인 다니엘도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쿠란의 단추를 전부 풀어헤치고 셔츠 자락을 밖으로 뺀 것까지는 언제나와 같았지만, 오늘은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전부 채우고 있다가 자리에 올라가서야 단추를 풀었다. 나름 마지막 군무라, 그 나름의 격식을 차리는 것일까.


다니엘의 의외인 점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꽤나 자유분방한 성격 같아 보이면서도, 의외로 격식을 따지는 자리에서는 격식을 따진다는 점. 그의 가쿠란은 조금은 품이 좁아, 단추를 다 잠그면 다소 답답해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위발표식 자리에서 제 순위가 불리기 전까지는 항상 끝까지 단추를 채웠다. 오늘도, 그래서일까.


“그건 왜 그렇게 끝까지 다 잠그고 있는데. 안 어울리게.”

“마지막이니까.”

“예전엔 안 그랬잖아.”

“그 때야 사이드였다 아이가. 지금은 센턴데.”


지훈은 손짓으로 다니엘을 불렀다.


“이리 와 봐요.”


그는 손을 내밀어 다니엘의 셔츠 제일 윗 단추를 풀었다. 가느다란 목걸이라도 하나쯤 하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벌려진 옷깃 속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니까. 형 답게.”

“내 다운 게 뭔데.”

“뭐긴 뭐야, 버스 뒷자리에 쩍벌하고 앉아서 빵셔틀시키는 일진 같은 거지.”


말 끝에 지훈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지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니엘도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축하해.”


별로 구겨지지도 않은 가쿠란의 목 뒤 깃을 괜히 손 끝으로 문질러 날을 세우며, 지훈은 그렇게 말했다.


“방송 하는 내내 딱 한 번만 센터 할 수 있으면 ‘나야나’ 센터 하고 싶었다고 그랬지. 결국 해냈네.”


다니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머뭇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스스럼없이, 남의 센터를 축하해 주는 날이 자신에게 있으리라고는.


“형이 전에 그랬죠. 방송 초반에 내가 몇 주간 1등한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포지션 평가 때였던가. 내 춤이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답 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자신에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1등을 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내가 너보다 나았으면 내가 1등을 하고 있을 거라고.


이제 그 말을, 주인에게 돌려줄 시간이 되었다.


“그 말, 똑같이 해 줄게. 형이 이 자리에 있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그 때는, 그 말이 이런 뜻인 걸 알지 못했다. 그저 풀이 죽어 있는 나를 달래려는 말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이 말의 의미는 이 말 이외의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오늘은, 이 춤은 내 춤도 아니고 대휘 춤도 아니야. 형 춤이야. 그러니, 나가서 멋있게 춰요.”


지훈은 손을 뻗어, 다니엘의 손 끝을 꽉 잡았다 놓았다. 그 언젠가, 함께 지샌 새벽 다음날의 대기실에서처럼.


“다 죽이고 와, 강다니엘.”






지훈의 자리는 다니엘의 오른쪽 바로 뒤였다.


다같이 뒤를 향해 돌아서 있다가, 박자를 따라 한 줄씩, 두 줄씩 뒤를 돌아 무대 정면을 보는 스텝.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돌아선 지훈은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잘 해, 라고, 짤막한 말이라도 해주려던 순간, 박자는 바뀌고 다니엘은 뒤로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긴장감 있게 당겨진 가쿠란의 익숙한 솔기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너를 보던 그 순간

시선 고정 너에게

눈부셔 Shining Shining

제발 내 맘을 Pick me Pick me


끌려가듯 박자를 탔다. 눈앞에 버티고 선 다니엘의 등은, 언제나 그랬듯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게서 자신을 막아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자신을 세상에게서 감추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몸에 밴 박자의 동작과 다니엘의 춤선이 지그시 맞아들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는 내겐 너무 예뻐서 꿈일까 난 너무 두려워

기억해 제발 이 순간 tonight


엇박을 타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들. 무대 아래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발을 딛고, 웨이브를 타고, 허공을 훑어 내리는 손 끝의 디테일이 지극히 익숙하면서도 생경했다. 역시, 오늘 밤의 이 춤은 대휘의 것도 자신의 것도 아닌 다니엘의 것이었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너만을 기다려 온 나야 나

네 맘을 훔칠 사람 나야 나

마지막 단 한 사람 나야 나


잠깐 박자가 죽는 찰나의 순간, 다니엘은 쓰윽 어깨를 젖히고 손을 들어 어깨 깃을 툭, 한 번 쳤다. 기대해라, 다 죽이고 올게-라고 말하던 그 날처럼. 그리고 그의 그 디테일이야말로, 나가서 다 죽이고 오라는 자신의 주문에 대한 무언의 대답임을 지훈은 알았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노래는 가파른 후렴구를 지나 간주를 향해 달려갔다. 숨이 차오를수록, 박자가 달릴수록, 몇 발 앞에서 박자를 헤치는 다니엘의 뒷모습은 눈부신 조명 속에 아련하게 흐려져 갔다.


같이 가.


지훈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가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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