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Time Light 25

25. Always 1

생방송을 앞두고, 다니엘은 머리를 다시 핑크색으로 염색했다.


물론 처음의 그 핑크색과 지금의 핑크색은 조금 달랐다. 초반의 핑크색은 말 그대로, 화단에 핀 장미의 분홍색 같은 핑크였다. 산뜻한 색깔이었지만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있었다. 반면 지금의 핑크색은 어딘가 톤 다운이 된 고급스러운 핑크색이었다. 그 차이가, 지나간 석 달 간 그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를 상징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경연 하루 전날은 꼬박 리허설 하는 데 들어갔다. 이번은 생방송인데다, 불러야 할 곡도 네 곡이나 되어 더욱 분주했다. 무대의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무대 곳곳을 밝히는 창백한 푸른 조명은 어쩐지 씁쓸했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첫 무대인 ‘나야나’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 지급받은 공식 단체복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101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원으로 시작했던 이 군무는, 이제는 스무 명이라는 단촐한 인원으로 대형이 다시 짜여졌고 오늘 밤이 지나면 11명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 소소한 것들부터 어딘가 기분이 묘해졌다.


다니엘, 위치가 조금 치우쳤는데. 오른쪽으로 한 발 정도만 움직여 봐.


부조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맞추었다. 기준점에 해당하는 다니엘의 위치가 바뀌자, 뒤에 늘어선 연습생들의 대형 또한 조금씩 움직여 바뀌었다.


오케이. 지금 대형이 기준입니다. 다들 자기 위치 잘 숙지하세요.


다니엘은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다가, 위치를 봐두려는 듯 좌우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긴장한 몸이라도 풀려는 듯 발 끝을 붙인 채 몇 번 가볍게 뜀을 뛰어 몸을 풀었다. 언제나 그렇듯, 단추를 다 풀어헤친 가쿠란에 노 타이 차림인 그에게서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날티가 났다.


“대휘야.”


문득 다니엘은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 대휘를 불렀다. 대열 조금 뒤쪽에 물러나 있던 대휘가 깜짝 놀라 이 쪽을 돌아보았다.


“어쩌지. 형 떨린다.”


사투리의 억양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말투로,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순식간에 접혀져 사라지는 눈꼬리를 쳐다보다가, 지훈도 그만 웃었다.


“떨리면 나랑 자리 바꿔요. 나 진짜 잘할 수 있는데.”

“그럴까.”


주변에서 소소한 웃음이 터졌다. 대휘를 향해 파이팅 포즈를 한 번 잡아주고, 다니엘은 다시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사라지고 엄숙하기까지 한 무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떨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이미 센터였다.






‘나야나’ 리허설을 마치고, 스무 명의 연습생들은 평가곡 컨셉트로 의상을 갈아입었다. 지훈의 조는 수트 컨셉트여서 이런 저런 디테일들이 복잡했다. 무대에서 이런 어른의 수트를 입어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잠시 시간이 뜨는 참에, 지훈은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왔다. 단체복이 아닌 무대 의상을 입고 바라보는 무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이 무대만도 이렇게 숨이 가쁠 만큼 벅찼다. 과연 이보다 더 큰 무대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그 무대를 잘 해낼 수 있을까.


“뭘 그래 넋을 팔고 있노.”


누군가가 느닷없이 뒤에서 어깨를 잡아, 지훈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평가곡 복장에서 재킷을 벗어젖히고 셔츠만 입은 차림의 다니엘이었다.


“의상 팀에서 니 찾더라. 얼른 가 봐라.”

“아, 응.”


서둘러 발을 떼려다가, 지훈은 다시금 인상을 쓰고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애쉬 핑크라고나 불러야 할까. 톤이 죽은 핑크색은 새삼 그에게는 또 잘 어울렸다. 입술에 바른 틴트의 색깔 또한 온 대한민국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은 끝에 이제는 자연스레 어울리는 색을 찾았다. 지훈의 시선은 그의 얼굴을 한참 맴돌다가, 슬쩍 깊이 넥이 파인 와인색 실크 셔츠의 자락에 한참 머물렀다.


“아 진짜. 이런 거 좀 하지 말랬더니.”


지난 번 컨셉트 평가 때는 어딘가 처연한 맛이라도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놓고 바람기가 철철 흘러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셔츠 미치겠다 진짜.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돼?”

“우짜겠노. 이번 컨셉트는 대놓고 색기다 아이가.”


안무가 워낙에 섹시해서 그렇지 그 컨셉은 섹시보다는 애절이나 처연에 가까웠던 앞 곡과는 달리, 이번 평가곡은 대놓고 유혹하는 컨셉트인 것은 지훈도 알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뭘 어쩌는가 보자 하고 있었더니, 이젠 정말로 대놓고 색기를 철철 흘리는 컨셉트여서 내심 빈정이 상했다.


“좋댄다.”


이번 안무는 다니엘과 우진이 짰다. 그 선 자체가 야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안무를 짜는 거냐고 몇 번이나 툴툴거린 적이 있었다. 그 안무를 그대로 수행하는 건 아니고 전문 안무가에게 약간의 검수를 거친다고 하기에 안심했는데, 돌아온 안무는 몇몇 부분이 더 노골적으로 바뀌어 있어 지훈을 기겁하게 했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게 형한테는 매번 이런 곡만 오는 거야, 아님 형이 들어가면 곡이 다 이렇게 바뀌는 거야?”

“모르겠다. 반반인가.”


문제는, 늘 옆에서 같이 연습을 하면서도 연습실 안에서는 이 안무가 어떤 느낌인지를 잘 알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연습복 차림으로 안무를 따라가는 다니엘은, 춤선이 깔끔하고 각잡혀 있다는 느낌은 들어도 대놓고 야하다거나 색기가 넘친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 비슷한 것을 차려놓고 의상을 갈아입은 후 리허설에 들어가면, 내가 그간 수태 봐왔던 그 춤이 저런 거였나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포지션 평가 때도 좀 그랬던 것 같긴 한데,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 그 형. 좀 그렇지.


콘셉트 평가 때 같은 조였던 학년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연습실에서 연습할 때는 그 춤 그렇게 야한 줄 몰랐잖아. 리허설 때 처음 보고 완전 기겁했거든. 이번 춤도, 본 무대 올라가면 아마 19금 붙어서 나갈걸.


“나 진짜 형 감당 안돼서 죽겠어. 어떡하지.”


지훈은 대놓고 투덜거렸다.


“매번 이런 식이면 그 때마다 화낼 수도 없고.”

“뭐가 걱정인데. 내는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니꺼라 했제, 내가.”


이제는 붕대를 푼 마디가 굵으면서도 선이 매끈한 손가락이 지훈의 뺨을 슬쩍 꼬집고 지나갔다.


"못 믿나."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7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