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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24

24. 아름다워 中

사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무섭다, 불안하다는 생각은 언제나 끈적한 찌꺼기처럼 마음 깊은 곳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상처와 같은 이야기였다. 처음 이 곳에 들어와 백 명이나 되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처음 본 순간 느낀 막연한 공포감. 날이 가고, 시간이 가고, 하나하나 남은 사람이 줄어가도 그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 뿐만이 아닌, 지금 이 곳에 남아있는 스무 명의 연습생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 속에만 가지고 있는 것과 입 밖으로 끄집어내 기어이 뱉어 놓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입 밖으로 내뱉어진 ‘무섭다’는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암담하게 지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과연, 지금 여기서, 이 사람에게 이 말을 해도 될 것이었을까.


다니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누운 지훈의 곁으로 밀고 들어와 등을 대고 누운 지훈을 끌어당겨 껴안았다. 조금 전까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졌던 몸은 놀랄 만큼 가볍게 그의 품 속에 끌려가 떨어졌다.


“괜찮다.”


무슨 말을 할까, 은근히 걱정했다. 그러나 다니엘이 대뜸 한 말은 그 짤막한 한마디였다.


“뭐가.”

“뭐든.”


여윈 지훈의 몸을 끌어안고 그 뒷덜미를 토닥이며,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됐든, 다 괜찮다.”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건 알았다. 자신의 말이라고, 다니엘의 말이라고, 이 불확실한 상황을 바꾸어 놓을 어떠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온 힘을 다해 중얼거리는 주문일 뿐이었다. 괜찮으리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우리는 어떻게든 잘 해낼 것이라고.


그러나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편안해졌다.


“니가 11등 안에 못 들 리도 없고.”


등을 쓰다듬어 다독이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러니까, 내하고 떨어질 리도 없다.”


그러고 보면, 그랬다. 그 꿈 속에 떨어져 헤매는 순간, 나를 짓눌렀던 건 11등 안에 못 들어 데뷔가 무산되는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사람과 영영 먼 곳으로 멀어져 먼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었을까.


“괜찮다.”


못을 박듯, 뚜껑을 닫듯, 다니엘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진짜다. 다 괜찮다.”


별다른 꾸미는 말도 없이, 그저 반복되는 괜찮다는 말.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몸을 움츠려 다니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그 옷깃을 붙잡았다.


“형은, 아무렇지 않아?”


이불과 옷깃 속에 파묻힌 채, 웅얼대는 목소리로 지훈은 물었다.


“끝이 다가오는 게.”


대답 대신, 말없이 뒷덜미를 쓰다듬는 손 끝. 언제나 그랬듯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 다니엘의 태도에서, 지훈은 어느 정도 그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보이나.”

“응.”

“우짜꼬.”


다니엘은 웃으며 물었다.


“멋있는 척 하까, 아니면 솔직하게 말하까.”

“솔직하게.”


지훈은 눈을 감고 대답했다.


“멋있는 척은 안 해도 돼. 형은 원래 멋있으니까.”


이런 간지러운 말은, 사실 지금처럼 마음이 약해진 때가 아니라면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어서 냉큼 해 버렸다. 대답 대신, 다니엘은 지훈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좀 더 꼭 껴안았다.


“내도 무섭다.”


그리고 다니엘은, 한참만에야 그렇게 대답했다.


“몇 달간, 아니 몇 년간 고생한 게 며칠 안에 결과로 나온다는 게. 그라고 그 결과가, 내는 짐작도 못한다는 게. 내도 무섭다. 니만 그런 거 아이다.”


나도 무섭다.


지훈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다니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은 미묘한 각도에서 미묘한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있다 아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내려다보는 다니엘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언제나처럼 담담했고, 조용했다.


“무섭다고, 여 계속 이래 붙잡혀 있을 수도 없다 아이가.”


다니엘은 손을 내밀어,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지훈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야 안 되겠나. 만약에 결과가 안 좋더라도 일단 끝이 나야, 다음이 있고.”

“...”

“만약에, 니나 내 중에 한 명이 11등 안에 못 들어가더라도, 이 방송이 끝나야 그 다음이 있을 거고.”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번에 데뷔조에 들어가면, 2018년 연말까지가 계약기간이라고 들었다. 그 때까지, 어쩌면 이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파트를, 센터를 욕심내지 않는 듯한 그의 태도에 그렇게나 화가 났던 건 결국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나는 과연, 이 사람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있을까. 다음이란 게. 그렇게 된대도.”

“나는, 여 오기 전에는 세상에 니라는 놈이 있는지도 몰랐다. 니도 그랬을 기다.”


다니엘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그는 조금 더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랬는데, 지금 내는 니꺼고, 니는 내꺼다 아이가.”


그러게. 그건 그랬다. 몇 달 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깊이 의지하게 될 줄, 얼마 전까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언제나 다른 길은 있더라. 그러니까, 너무 겁 묵지 마라.”


언제나 다른 길은 있다.


지훈은 눈을 감고 입 속으로 그 말을 따라 외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뭔가에 짓눌려 있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평온해졌다.


“그라고, 고맙다. 어려운 말 해 주서.”

“뭐가.”

“니 자존심에, 하기 쉬운 말 아니었을 거 내가 다 안다. 그래서, 고맙다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자신과 다니엘은 벌써 몇 주간이나 1위를 놓고 겨루고 있는 ‘라이벌’이었다. 마지막 생방송에서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런 사람에게, 무섭다는 말을 솔직하게 해 버린 자신의 무모함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말로만?”

“말 말고, 뭐 필요한데.”

“형.”


지훈은 다니엘의 목에 팔을 감고, 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형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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