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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21

21. 소나기 下

빗발은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합숙소 입구 층계참에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색이 짙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웅크려 앉은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자니 점점 할 말이 없어져 갔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


“뭐하노, 거 서서.”


지훈이 한참을 어물거리는 사이, 다니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드가라. 비 맞는다.”

“...”

“얼른.”


대답 대신, 지훈은 터덜터덜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곁에 주저앉았다. 뭐라도 듣고 있었던 건지, 흰 이어폰 줄이 턱선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형은 뭐해요, 안 들어오고.”


다니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 초간의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멀게 느껴졌다.


“니 자믄 들어갈라고.”


뜨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까 낮에 쏟아부은 말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마음에 박혔다. 왜 나는, 아까 그렇게 내지른 말들이 결국은 이렇게 빨리 되돌아올 것을 알지 못했을까.


“형, 저기 아까는.”

“됐다.”

“내가.”

“안다.”

“그게, 그렇게까지 말하려고 했던 건.”

“괜찮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 그제야 다니엘은 아주 흐릿하게나마 웃었다.


“내 다 안다.”


알다니, 뭘 아는데.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그걸 형이 안다고?


“내가 뭐, 언제는 니가 말 안한다고 몰랐던 거도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쯤 꺼냈던 미안하다는 말은 거꾸로 역류해 다시 입 속으로 숨어 버렸다.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다 안다, 라는 저 말 한 마디에 막혀서.


“뭐 들어요?”

“소나기.”

“듣지 마.”


지훈은 손을 뻗어, 이어폰 선을 잡아당겨 빼 버렸다.


“그런 노래를 왜 지금 듣고 그래.”


괜찮아요

금방 지나갈 소나기죠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선배 걸 그룹이 해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낸 곡.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기간이 정해진 관계, 처음부터 끝이 정해져 있는 이별. 요즘따라, 그런 말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하필이면 그런 노래를, 오늘 같은 날 듣고 있는 걸까.


“들어나 봐라. 노래 좋다.”


다니엘은 묵묵히 지훈이 잡아당겨 빼버린 이어폰을 지훈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아니 무슨...”


어느 단편 소설 속에 넌 떠오르지

표정 없이 미소 짓던 모습들이

그것은 눈부신 색으로 쓰여지다

어느샌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났지


지훈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 노래는 지훈이 아는 그 ‘소나기’가 아니었다. 차분한 기타 리프에 실린 보컬의 음색은 담백했고,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을 긁고 지나가며 생채기를 냈다.


“무슨 노랜데요?”

“소나기.”

“누구 노래냐고.”

“부활.”


세워 앉은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다니엘은 대답했다.


“디기 오래된 노래다. 아마 니나 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노래일 건데.”


다니엘은 흘끗 시선을 돌려 지훈을 쳐다보다가, 후드를 벗고 돌려쓰고 있던 스냅백을 벗어 지훈의 머리에 푹 뒤집어 씌웠다.


“옛날에 비보이할 때 알던 형이 좋아하던 노랜데, 비 오는 날 되믄 가끔 생각나더라.”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하려던 말은 더욱 선명해지는 것도 같고, 흐릿하게 뭉개져 안으로 삭아드는 것도 같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말없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방울과, 처음 듣지만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것 같은 멜로디와, 얇디얇은 이어폰의 줄 하나로 이어진 타인의 존재까지.


“훈아.”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경상도 사람들이, 흔히 이름의 끝자만 따서 부르곤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자신을 이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같나.”

“뭐가.”

“내는, 뭐, 이라다가 같이 데뷔하면 하고, 안 되면 말고, 그래 생각하는 거 같나 그 말이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뻔하디 뻔한 아니라는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밀려나오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의 대답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았다.


“니도 니 나름대로, 힘들었겠지. 근데 안 있나.”


천천히 쥐었다 펴지는 다니엘의 손 끝에서 가볍게 마디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내도 쉽게 여까지 온 거 아이다.”

“알아요.”

“알믄.”


천천히 돌려져 지훈을 보는 그 눈은 서늘했고, 담담했다.


“믿어라.”


시작하는 듯 끝이 나 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 걸 적었네


“형이 잘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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