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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21

21. 소나기 中

순간 다니엘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잘 웃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가는 말이나 상황이 정말로 웃긴가 아닌가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자신을 웃기려는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대에게서 남을 웃겨보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는 그 의도에 반응해 웃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대의 의중에 대한, 일종의 센서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만큼, 웃지 않는 그는 서늘했다.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그는 단단했고, 낯설었고, 멀었다. 그 서늘한 눈으로, 다니엘은 지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낮게 깔린 음성은 담담했다.


“그런데 안 있나.”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써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상해서였다. 아니, 어쩌면, 질투 비슷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


“내한테도 내 나름의 생각이라는 게 있다.”

“무슨 생각.”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거라면, 맡은 거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는 게 옳았다. 형이야 뭐, 뭘 해도 다 잘할 거라고, 웃는 얼굴로 말해주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저만치 구석으로 밀려나, 어지간해서는 의식의 복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속이 상해서, 화가 나서, 섭섭해서.


“1등 한 번 하고 나니까, 그냥 이제 다 끝난 거 같지.”

“야.”

“건방 떨지 마.”


지훈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벌써 뭐라도 된 거 같아? 우린 그냥 연습생이야. 정신 차려요.”






그 날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속도 좋지 않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을 핑계로 지훈은 이불을 둘러쓰고 누웠다. 별로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다니엘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에게 해 버린 말들이, 몇 배로 아프게 가슴을 헤집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말할 일은, 또 아니었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가 어린 가슴을 먹먹하게 잠식해 들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든 선잠 속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꿈 속을 스쳐갔다. 그 꿈들 중 일부는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이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렸다. 어떻게 누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몸이 축축 처졌다. 다 잊어버리고 잠이라도 잤으면 했지만, 잠조차 쉽게 잘 들지 않았다.


“박지훈아.”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성우였다. 지훈은 꾸물대며 이불을 끌어내리고 부은 눈을 억지로 떴다.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성우의 얼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보였다.


“많이 아프냐.”


이마를 짚어보는 손은 다니엘의 그것과 비슷했다. 친하면, 이런 것도 닮는가 싶어 쓴웃음이 났다.


“아니에요.”


억지로 손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성우는 가만히 손을 내저어 그런 지훈을 말렸다. 그는 침대 한 쪽 귀퉁이에 걸터앉아 딱하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속 많이 상하냐?”

“네?”

“다니엘 포지션 꼬여서.”


뜨끔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입 속에 넣었다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 같았다. 지훈은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하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렇게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고 다니면서 모를 줄 알았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래서는, 아니라는 말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다 알고 물어오는 상대에게 부질없이 버티는 건 아무 소용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너도 뭐.”

“제가 뭘요?”

“너도 그냥 랩 2 갔잖아. 2등이면 다른 사람 밀어내고 너 좋은 자리 갈 수도 있었는데.”

“그건.”

“내가 보기엔 둘이 아주 똑같아. 진짜, 완전, 레알, 헐, 세트야. 원 플러스 원 뭐 그런 거. 이건 뭐 테이프로 꽁꽁 싸매 놔 버릴 수도 없고.”


뭐라고 항변을 하려다가, 지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 이 사람에게 변명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너네 둘 다 예뻐하는 거지만.”


성우는 손을 뻗어 지훈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흩어놓았다. 지훈은 입을 다물고 이불깃 한 구석을 만지작거렸다.


“이해가 안 돼요.”


지훈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상황에, 왜 그렇게 자기 생각은 안 하는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성우는 피식 웃었다.


“그럼 어제 그 상황에서, 다니엘이 자기 파트 생각만 해서 포지션 엉클어놓으면, 그 무대 좋게 나올까.”

“그렇지만.”

“아마 비공식까지 다 따지면 내가 여기서 이 바닥 짬밥이 제일 길 건데.”


다니엘 못지 않게 언제나 유쾌한 것으로 유명한 성우는, 사실 꽤 연습생으로서의 굴곡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상한 기획사에 발목이 잡혀 10년 가까이를 날리다시피 했고, 나름 그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이 방송에 나온 것을 지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유쾌했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른 사람을 대했다. 과연,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라도, 지훈은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대가 살아야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살아. 무대가 망하고 거기 한 두 명만 잘하면, 그거 눈에 안 띄어. 잘한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 버리거든. 춤 안 맞고 동선 꼬이고 서보들이 여기저기서 삑사리 내는데 메보만 미쳐봐야, 그 무대 아무도 좋게 안 봐. 너도 알지?”


몰랐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게 이유였던 걸까.


“다니엘은 아마 그걸 생각한 걸 거다. 그 놈이 원래는 그렇게 생각 많은 캐릭터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근래 들어 좀 변했어. 너도 느끼겠지만.”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모르지도 않았으면서 마음 한 구석으로 밀쳐놓았던 생각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창밖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제법 굵은 빗발이 내리고 있었다.


“제가 뭘 어쩌면 될까요.”


지훈은 조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웃어 줘.”


성우는 대답했다.


“그 놈은 아마 그거 하나로 충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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