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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20

20. Missing You 上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지키기는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며칠 동안 준비한 경연의 결과로 몇 달간 같은 공간에서 지내던 동료들이 사라지는 패턴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웃을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몰렸다고 해서 그 상황에 어디까지나 짓눌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나름의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입장포즈는 그렇게 발굴된, 순위발표식의 소소한 재미였다. 원래는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연습생들은 순위발표식에 입장하면서 제 각각의 포즈나 댄스를 연구해 오기 시작했고 제작진 또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찍어다가 재미있는 그림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게는 그 순간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크게는 그 짧은 시간 중에라도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소산이기도 했다.


같은 기획사 소속의 동료가 많이 남아 있으면 의논을 할 여지도 생기고, 이런 저런 것을 시도할 용기도 나는 법이었다. 그러나 개인연습생이거나 같이 참가한 동료들이 다 떨어지고 혼자만 남은 경우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지훈 또한 어느덧 함께 시작했던 같은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이 다 떨어지고 혼자만 남은 상태였다. 혼자서 뭘 하면 좀 재미있을까.


“형은 뭐 해요?”

“내야 뭔 힘이 있나. 지성이 형이 시키는 대로 하지.”

“또 걸 그룹 할 거야?”

“몰라.”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다니엘은 지그시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여튼 취미 이상하다 아이가.”

“형이 너무 잘 맞춰주니까 재미 붙여서 그러는 거잖아.”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 순위발표식 입장 때마다 걸그룹 댄스를 간단하게 추고 들어가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었다. 다니엘 또한 작지도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제법 시치미를 뚝 떼고 잘 맞춰서, 지훈은 늘 웃음을 참느라 입 속 살을 깨물어야 했다.


“그라믄 어짜노. 딱 잘라서 안한다 하나.”


투덜거리던 다니엘의 얼굴이 생각나 한참을 혼자 키득거리다가, 지훈은 싱긋 웃었다. 좋은 포즈가 생각났다.


먼저 들어간 다니엘의 차례에, 안에서는 또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녹화 전 흔들거리는 품을 보니 대충 한 선배 걸 그룹의 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취미 이상하다고 툴툴거리면서도 하자는 대로 다 맞춰주고 있는 걸 보면 자기도 내심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몇 사람을 지나, 지훈의 차례가 되었다. 지훈은 순서에 맞춰 안으로 걸어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입고 있는 교복 블레이저의 어깨 깃을 탁 쳐서 추스르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기대해라. 다 직이고 오께.


경연 날 무대에 오르기 직전,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저만치 앉아있던 다니엘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지훈은 그런 그를 본 체 만 체하고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뒤를 따라 들어온 진영이 똑같은 포즈를 따라하는 걸 보고, 다니엘이 저거 지훈이랑 똑같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지훈이 웃었다.






순위가 발표되기 전 앉는 자리는 방송국이 바라는 그림에 맞게 세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의 곁에는 같은 소속사 출신인 지성과, 다니엘이 유독 귀여워하는 우진의 자리가 배정되었다.


본격적인 순위 발표가 시작되기 전, 경연날 발표되지 않은 현장 투표 1위가 발표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다니엘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 신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 1등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역시나, 1위는 다니엘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을, 지훈은 박수를 치는 곁눈질로 흘끔,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10만 표다. 이번 경연의 최종 1등도, 아마도 그의 몫이 아닐까.


“실패네.”


지훈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깔아버리려고 했더니. 하기야, 쉬운 상대 같은 건 원래도 취미 없었다. 어차피 승부는 한 번이 더 남았으니까. 마지막에 웃는 게 진짜 웃는 거라고 했으니까.


순위발표가 시작되었다. 커트라인은 지난 시즌의 22명에서 그나마 두 명 줄어든 스무 명이라고 한다. 어째 이 프로그램은 점점 더 잔인해지는 것 같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무대까지 데려갔다가 떨구는 것이 더 잔인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문득, 희망순위에 22를 써냈던 다니엘이 떠올라 새삼 웃음이 터졌다. 그랬으면, 형 오늘 탈락이네. 물론 저 사람은, 그랬더라도, 여전히 저런 얼굴로 저기 저 자리에 앉아서 1위 자리를 노려보고 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마지막 한 자리를 남겨두고. 19위부터 발표가 시작되었다. 19위부터 16위까지, 그야말로 탈락을 겨우 면한 자리에 호명된 네 명의 연습생 중 세 사람이 다니엘의 조 멤버였다. 1위를 해서 얻은 2만표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사람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지훈은 흘끗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엷은 미소를 띠고 무대 위를 바라보던 다니엘은, 시선을 느꼈는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아주 잠깐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는 입모양으로 그렇게 물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뭔 일인데.]


다시 한 번 세차게 고개를 젓고, 손을 엇갈아 엑스 표시를 그렸다. 방송 중이다. 이런 게 찍혀서 좋을 일은 없다. 지훈은 모른 체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다 형.


그낭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 몸에, 그 마음에, 절반이나 멤버가 바뀐 조를 가지고

떨어졌을 사람을 세 명이나 살려냈구나.


이 자리를 물러나가 얼굴을 보게 되면,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을까.


수고했어요. 고생했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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