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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9.5

번외. Limitless

국민 프로듀서님의 No.1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소년에게 투표하세요.






혼자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낯을 가리거나 기가 잘 죽는 성격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격이었다면, 연습생으로는 그리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바닥에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니엘이 알던 작고 좁은 세계에 한정한 이야기였다.


이 곳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몰랐던 바는 아니었다. 1층 위에 2층이 있는 것처럼, 2층 위에 3층이, 4층이, 옥상이 있는 것처럼 한 발만 벗어나도 또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 곳이라는 것을. 물론 그 한 발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화면에 등수가 띄워졌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송 시작 전 면담을 하면서 작성했던 설문지에 적었던 목표등수가, 화면에 적나라하게 띄워졌기 때문에. 그나마 같이 온 형들의 목표 등수들이 예사롭지 않아, 그건 다행한 일이었다.


“난 학교 다닐 때도 25등을 해본 적이 없어.”


지성의 호들갑에 모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25등이 반에서 25등이냐 전교에서 25등이냐, 전교에서 25등이나 했으면 내가 여기 왜 앉아있겠느냐는 둥의 만담에 가까운 잡담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제일 옆으로 비껴 앉아 형들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니엘은 언제나 그랬듯 피식피식 웃고만 있었다.


[목표등수]


분명히 그런 항목이 있었다.


뭐라고 쓸 것인가,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도 났다. 어차피 희망등수니까 1등쯤 써넣어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역시 내키지 않았다. 누구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괜히 혼자 뒤가 켕기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오히려 테이블 너머에서 넘겨다보던 작가가 웃으며 말하던 기억도 났다.


그냥 참고자료야. 참고자료니까, 부담 없이 써요.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닌 말로, 여기 1등을 쓴다고 해서 1등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답지 않은 신중함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디 보자, 최종 데뷔가 11등까지라고 했지.


지난 시즌 프로그램은 다니엘도 대충은 지켜봤다. 최후에 남는 것은 2배수인 22등까지였다. 그 중에서도 절반만이 살아남아 데뷔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 안에 들기만 해도 좋겠지만, 10대 1에 가까운 이 경쟁률을 뚫고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22]


결국 다니엘이 써넣은 숫자는 그것이었다.


22? 생방까진 가보고 싶다?

네.

이왕 생방까지 갈 거면 11이라고 쓰지 그랬어요.

그기 쉽겠습니꺼.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그게 쉽겠느냐. 그 말이야말로 정답이었다. 듣자 하니, 대한민국 3대 기획사라고 하는 곳에서는 소속 연습생을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 곳에 모인 연습생들 또한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어디의 누구가 노래를 잘한다더라, 춤이 쩐다더라 하는 소문 한 두 가지쯤은 달고 다니는 유명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처음 듣더라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겼거나,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것이 분명한 정도의 재주 한 두가지쯤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바닥에서, 22등이라. 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흘끔, 곁에 앉은 형들을 훑어보았다. 새삼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참가한 참가자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이 거대한 공간의 중압감을, 혼자서라면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


순간, 앞줄에 앉아있다 뒤를 돌아보는 소년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분명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연한 갈색 머리, 뽀얀 얼굴에 어울리는 흰 옷을 입은 소년은, 분명 같은 소속사 소속의 친구들인 걸로 보이는 친구들과 한껏 웃음을 띤 얼굴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서 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얼굴에서는 일시에 미소가 가셨다. 그리고 싸늘할 만큼의 무표정이 그 얼굴 위를 스쳐갔다.


아주 찰나의 순간, 아직 서로의 이름도 채 다 몰랐던 두 사람은 100여명의 연습생이 모인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뭘 봐?”


곁에 앉은 재한이 물었다.


“누구 유명한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요, 저기 앞에. 그냥 눈 마주치서.”

“누구?”


덩달아 호기심이 발동한 듯 재한이 고개를 빼어 앞쪽을 바라보았지만, 소년은 더 이상 이 쪽을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22등이 뭐야, 22등이. 남자가 패기가 있어야지.


“야, 그거는. 겸손한 거지.”


그러게, 아주 까마득한 옛날 같다. 불과 서너 달 전의 일이라고는 차마 믿어지지 않는, 아마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시절의 이야기. 다니엘은 그날, 그 설문지의 목표등수 칸에 22라는 숫자를 써넣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근데 니는 그거를 우째 기억하는데.”


22라는 숫자가 웃겨서 기억하지. 뭐야, 라고 생각했거든. 22등이면 생방까지는 가겠다는 말인데, 생방까지 가서 데뷔 못하면 그게 제일 억울한 거잖아.


그 때 들은 작가의 말과도 비슷한 말이었다. 그러게,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어차피 생방까지 갈 거면 데뷔를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왜 그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아무튼 많이 컸어, 22등. 엠카를 다 나가고.


수화기 너머 들리는 지훈의 목소리가 웃고 있었다.


내일 방송 잘해. 적당히 풀어헤치고.


“알았다.”


암튼 미워 죽겠어. 다시는 하지 말랬더니, 이젠 2천명도 아니고 전 국민이 다 보는 음방 나가서 옷을 막 풀어헤치려고 그러고. 아무튼 간수하기 어렵다니까.


“니 지금 샘 내나.”


왜, 안 돼?


“안 되기는.”


너는 알고 있을까. 내 마음 속의 22라는 숫자가 지워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더 높은 자리가 필요하겠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아 버린 것을-


“그래봤자 내가 어데 가겠나.”


아마도 이 피라미드 속 가장 높은 곳에 예약돼 있을, 네 자리 곁 어딘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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