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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re:19

re:19. Oh, Little Girl 下

함성과 앵콜 속에 다니엘의 무대는 끝났다. 그 함성은 바깥에서만 들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연습생들이 다닥다닥 모여 앉은 대기실 안에서도 터져 나왔다. 완전 미쳤어! 하고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감이었다. 미친 무대였다. 뭔가에 넋이 나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무대였다.


세트를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지훈은 일단 대기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참았다가 나중에 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지금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무대 뒤쪽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무대를 마치고, 다니엘의 조 멤버들이 막 내려오는 참이었다.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건네고, 제일 뒤에 내려오는 다니엘의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채로, 그는 흥분과 전율에 들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마를 따라 군데군데 땀이 맺힌 그 얼굴은 핼쓱하게 질려 있었다.


“봤나.”


눈이 마주치자, 그는 그래도 웃으며 물었다.


“응. 봤어.”


진짜 끔찍하게 야했어.

그러나 그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뭐라대. 다 직이고 온댔제.”


원래도 빈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더욱 그랬다. 다 죽이고 오겠다더니 그는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네, 잘나셨어요. 지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손은.”

“괜찮다.”

“괜찮기는. 가만히 모셔놓고만 있어도 3주라며. 그렇게 별별 짓을 다 하니까 안 낫잖아요.”


바라보는 눈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 웃는 얼굴은 지극히 눈에 익으면서도, 또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 것도 같아 새삼 가슴이 저렸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지훈은 앞서 두 번의 경연에서 다니엘이 받아들었던 성적표를 떠올렸다. 경쟁자 이전에, 자신이 보기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성적과 표수들. 그 일은 이번에도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랬거나 저랬거나, 어깨에 짊어졌던 그 모든 짐들을 벗어버린 지금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다음 차례제.”

“응.”

“가서 잘해라.”

“그럴 거야.”


지훈은 주머니를 뒤져 물티슈를 꺼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대기실에서부터 일부러 준비해 둔 것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물티슈 한 장을 꺼내 들뜬 숨을 몰아쉬는 다니엘의 입술에 묻은 틴트를 닦아 버렸다.


“뭔데.”

“이제 다 끝났지?”


아직 정확히,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다는 알지 못하겠다. 아니,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이었는지 아닌지, 어쩌면 그냥 나만의 착각이었을 뿐인지도.


“형도 기대해.”


그러나 이제는, 알아들은 만큼의 대답을 지훈이 할 차례였다.


“내가 다 살려놓고 올 거니까.”






무대가 밝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훈은 거의 처음으로 했다. 인공의 빛이나마, 머리위에서 쏟아지는 백열빛의 조명은 한낮의 햇살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잘 부풀어 오른 솜사탕 같은 멜로디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스텝으로 지훈은 무대를 시작했다. 앞서 본 다니엘의 무대를 깡그리 지워 없애겠다는 각오로. 여기 모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무대에 서 있었던 사람에게서조차도. 너무나 피곤해 밥 먹을 기운조차 없는 날, 초콜릿 한 조각을 집어먹는 그런 기분처럼.


사랑보다 깊은 감정을 느껴

지금 누구보다 약하면서도 강해


엄청 쓴 커피를 마실 때처럼 입 안 가득 물고, 삼키지 말고, 즐기라고. 이 순간을.

언젠가 다니엘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원래 소풍은 가서보다 가기 전날이 더 설레는 거라고. 지금 이 순간의 혼란을, 두근거림을, 불안함조차도 즐기라고.


운명보다 더 운명 같은 널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어쩌면 그보다 더 깊고 오래된 어떤 것이었을지도.


이 길의 끝에서, 형과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마법은, 어쩌면 너무 빨리 풀려버릴 수도 있고

또 제 때 맞춰 풀리지 않아 우리를 상처 입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먼저 두려워하지는 않으려고.

먼저 겁을 먹고 물러나지는 않으려고.


그 아름다움 앞에 상냥해지는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 무대 위에서, 다니엘이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대놓고 물어본대도 만족할만한 답 같은 건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훈이 느낀 것은 지독한 외로움과 힘겨움, 흔들림 같은 동요에 가까운 혼란한 감정들뿐이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위로하는 것이 맞는지, 아직 지훈은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형은 그다지 작지도 않고

심지어 소녀 같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허락한다면

아직은 어리고, 아직은 솔직하지도 못하고

내 마음 나조차 몰라 갈팡질팡 흔들리는 이런 나라도 상관없다면

그런 거라면


이제부터 내가 형의 곁에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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