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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9

19. 열어줘 中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날은, 결국 왔다.


전날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다니엘은 차 안에서 쪽잠을 잤다. 그 잠조차 그리 깊고 달콤하지는 못했다. 잠을 자는 내내, 다니엘은 의식을 뚫고 들어오는 음원의 비트와 멜로디라인에 시달렸다. 바뀌는 대형, 동선, 멤버들의 위치, 자신이 서야 할 곳, 카메라의 위치, 관객석의 위치, 노래, 가사, 음악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의식 속을 명멸했다.


그렇게 잔 잠은, 하나도 잔 것 같지 않았다. 눈은 부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머리는 술 마신 다음날처럼 띵했고 붕대를 감은 오른손은 여전히 뻐근하게 아팠다. 차에서 내리기 전, 다니엘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어제 리허설 때 세팅해 놓은 대로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만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것이 몇 번째. 거울 너머 보이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메이크업을 잠시 멈추고, 눈에 안약을 넣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안약의 촉감이 생경했다.


졸렸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가 확보된대도 정작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억지로 메이크업을 마치고, 다니엘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경연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불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쳐져 있는 몸으로는 무대를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마지막 한 가닥이 모자랐다. 그런데 뭐가 부족한지 알 수가 없다는 게 답답했다. 박자도, 타이밍도, 동작도, 꿈에라도 읊을 수 있을 만큼 연습했다. 표정과 손 끝, 시선 처리하는 디테일도 더는 할 수 없다 싶을 만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뭔가가 부족했다. 많지도 않은, 딱 한 뼘이 모자랐다. 그게 뭘까. 그게 도대체 뭘까. 머리가 아팠다. 지금 무대에 나서도 웬만큼 해 낼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뼘을 찾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끝장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뜨끔한 통증에 손이 떨렸다.


억지로 감아 놓은 붕대 안 쪽이 욱씬거렸다. 이래서는 무리였다. 파우치를 열어 약을 꺼냈다. 보통은 한 알, 아주 통증이 심하면 두 알 정도나 겨우 먹는 약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이 지독한 통증이 가라앉을지 어떨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세 알, 아니 네 알을 덜어 꿀꺽 삼켰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작렬감이 인후를 타고 흘렀다.


다니엘은 나직한 신음 소리를 뱉으며 의자에 철썩 주저앉았다.


통증은 가시지 않고 의식만 멍해졌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감각에 온 몸이 흔들렸다. 발 밑이 울렁거렸다. 구름을 밟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가

나를 좀.


“형.”


그 때,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빛에 반응하는 그림자처럼,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맑아지기도 전에 차디찬 손이 살짝 이마를 짚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훈이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걱정스레 보는 시선을.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여기 너 말고 또 있을 리가 없겠지.


“괜찮아요?”


아.

어젯밤 그렇게나 간절했던 그 목소리였다.


“괜찮다.”


일단 웃었다.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이 없었지만.


“이 정도로 안 죽는다 했제, 내가.”

“말이나 못하면.”


다시금, 누군가의 손이 툭, 팔뚝 위를 때리고 지나갔다. 이번엔 별로 아프지 않다. 힘을 주어 때린 게 아닌 모양인지.


“왜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고 그래. 미워 죽겠어.”


가만히 흔들리는 어린 목소리.


언젠가 지훈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나 나보다 어른이냐고.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없다. 내가 과연, 그렇게나 너를 얕봐도 될 만큼 어른인지.


“울지 마라.”


손을 뻗었다.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거듭거듭 손짓을 해 결국 곁으로 불렀다. 손 끝에 뺨이 닿았다. 이미 눈시울이 촉촉하다. 딱하게도.


“좋아해 주지 말 걸 그랬어. 이렇게 속상할 줄 알았으면.”

“야, 니는.”


그러게, 생각하자면, 언제부터였을까.


끝도 없이 너를 쫓고 있던 내 시선을 스스로 느꼈을 때. 자꾸만 눈에 밟히고,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나 하나의 앞가림조차 잘 하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그런 것들이 마음 쓰이던 그 때부터.


“무슨.”


처음엔 그냥 생각만으로도 좋았다. 강요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쯤,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저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포지션 평가 때 경연곡이 적힌 패널 앞에 선 순간, 무엇을 골라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지가 아니라, 너라면 어떤 노래를 골랐을까를 추측하느라 온 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곤두섰었다면. 그렇게 질끈 눈을 감고 고른 곡 아래 네가 서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야 했다면.


그래서, 그랬기에, 턱없이 마음의 허들이 내려가 버린 상태로,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길지도 모르는 그 실수의 순간들을, 그래도 웃으며 지나간 것이라면.


“그런 말을.”


너는

언제쯤

정말로 나를 좋아해줄까.


“지훈아.”


지훈을 부르는 다니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니는, 내가 언제부터 니 좋아했는지, 아나?”

“응?”


되묻는 목소리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겠지만.


“아니, 나는.”


운명처럼 깊숙이 파고들어


그렇구나.

마지막 한 끗은, 그렇게 다니엘의 손 끝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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