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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9

19. 열어줘 上

리허설은 12시를 한참 넘긴 새벽에야 끝이 났다.


어디 가서든, 연습을 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남들 연습할 때 연습하고 남들 잘 때도 연습했지만 그래도 연습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동작과 동선에 입을 댈 데가 없을 만큼 숙지를 마친 것은 원래부터도 이 곡에 배정되었고 별다른 포지션 변동이 없는 동호뿐이었다. 켄타와 용국은 포지션이 중간에 바뀌어서, 선호와 영민, 학년은 중간에 들어온 멤버들이라 아직도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불안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요. 오늘은, 쉽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전에 성우 형이 그랬거든요. 꼭 보면 공부 못하는 것들이 시험 치기 전날 날밤 새고 시험 시간에 존다고.


잔잔하게 웃음이 터졌다.


우리 컨셉은 죽으나사나 ‘섹시’입니다. 섹시할라믄,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어야 됩니다. 다크 서클 처진 거, 별로 안 섹시합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잘합시다.


아이돌 연습생이 아니라 팀 스포츠를 하는 운동선수들처럼, 그의 그 한 마디에 모두는 박수를 치고 자리를 파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말을 해 놓고, 다니엘은 혼자 연습실로 갔다.


모두들 요령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 따라와 주었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각자의 동작 및 동선 숙지에 급급해, 일곱 명 모두의 합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경우 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모두의 눈이 쏠릴만한 미끼. 모두의 넋을 빼놓을 만한 미끼. 일단 그 쪽으로 시선을 모으면, 다른 멤버들 간의 합이 다소 맞지 않는 것 정도는 어찌어찌 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미끼 역할은 아무래도 자신의 몫이었다.


연습실로 가는 내내, 다니엘은 내일 공연곡을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최대한 높인 후 머리가 아픈 것처럼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듣고 반응하면 이미 늦다. 모든 박자를, 모든 순간을 다 외워야 했다. 사람의 눈은 간사하지만 정확하다. 내가 앞서서 박자를 타는 것과 뒤늦게 박자에 끌려가는 것을 정확하게 안다. 그래서는, 이 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다시, 하나하나 동작을 그리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선호가 고마웠다. 중간에 들어온 데다 ‘섹시’라는 개념 자체에 겁을 먹은 선호를 가르치기 위해, 다니엘은 필요 이상으로 춤의 디테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훑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또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 깨닫게 되었다.


말하기 쉬워 ‘섹시’라고 한다. 그러나 섹시한 춤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 곡의 섹시는 흐느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칼날 같은 날카로움에서 나오는 것으로 다니엘은 판단했다. 동작과 동작의 연결이 빠르고 정확할 것, 머뭇거리지 않을 것, 그러는 중에, 선이 부드럽고 예민할 것. 대충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너를 볼 때면 맘이 요동쳐

숨도 쉴 틈 없이 너에게로 달려가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게

멈춰버린 듯이 너 하나로 가득해


“아, 씨발.”


살짝 손 끝을 쓰는 안무가 있었다. 욱씬거리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큰 부상은 아니고 조금만 안정하면 낫는다던 개소리는 도대체 누가 처음 한 건지, 다니엘은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주워섬겼다.


손목 아래까지 통증이 전달되는 부상은 아니었다. 손 부분을 살리는 안무를 포기하면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나 이 안무는 디테일이 중요했다. 원래도 그런 참에, 자신이 나서서 모두의 이목을 끌려면 더더욱 그랬다. 이럴까봐, 병원에서 미리 타다 놓은 진통제가 남아 있어서 그 점은 다행이었다. 꽤 독한 약이니, 무대 오르기 전 서너 알 정도 털어먹으면 어떻게든, 약 기운에 무대는 뛸 수 있을 터였다.


“속 존나 쓰리겠네.”


그 때까지도 안 나으믄 약이라도 빨고 무대 해야지.


언제였던지, 지훈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의 말에는 일정한 힘이 있어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다니엘은 믿었다. 그 때 그런 말을 해서, 정말로 약 빨고 무대에 서게 생겼으니 이것 또한 그 사례 중 하나라고나 해야 할지.


“아, 존나.”


싸늘한 통증이 팔뚝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이 부상은, 과연 낫고 있기나 한 것일까. 가끔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 꼴을 하고 생방송 무대까지 가야 된다는 것일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좋은 말이야, 물론 하지 않겠지. 새 나라의 어린이도 아닌 주제에 11시가 넘어가면 급격히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지훈이었다. 지금 전화를 하면 대번 잠투정을 하겠지. 왜 전화해서 사람 귀찮게 하냐고, 형도 얼른 들어가 잠이나 자요 하고 틱틱대겠지. 그런데 그 목소리조차 간절했다. 그 언젠가처럼 명치에 멍이 들도록 맞더라도, 어떻게, 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 한 조각이라도 들을 수는, 없을까.


“치아라.”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다니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데 치댈 데가 없어가, 얼라한테.”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 것조차 내게 주어진 잔이라면,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져 있었던 것일 테다. 하기야,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서, 여기서 이대로 탈락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뒤질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어야 맞지.”


느슨해진 붕대를 풀어 꽉 조여 다시 감았다. 소소한 잔부상을 달고 살던 비보이 시절에 배운 잔재주 중의 하나였다. 그 때부터도, 덩치 답지 않게 붕대 꼼꼼하게 잘 감는다는 칭찬은 여기저기서 듣던 차였다.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지만.


“뒤져도 오늘은 말고 내일 밤에, 할 거는 좀 해 놓고 뒤지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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