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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6.5

번외. Wake Me Up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사실은 별로 거창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저 보면 좋고, 웃음이 나고, 자꾸 보고 싶은, 아주 사소한 감정의 집합들이 아닐까.


다니엘은 투명한 녀석이었다. 그것은 솔직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성질이었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털털한 유쾌함이 있는 그는, 애초에 자신의 속을 감추는 법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 바깥에서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랄까. 이런 성격은 때론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그런 성격은 편하고 서글서글해서 좋았다.


그래서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눈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쫓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일정했다는 것을. 그것이 호기심이나 호승심, 혹은 질투심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는 데도 그리 큰 노력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다니엘이 지훈에게 특별한 종류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성우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건 남자가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느냐 운운하는 것과는 조금은 그 궤를 달리하는 종류의 호기심이었다. 마치 시멘트를 처덕처덕 발라놓은 도시의 거리 한 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민들레나, 이름 모를 풀꽃 한 포기를 발견한 듯한, 일종의 경이라고나 불러야 좋을 그 어떤 것이었다.


101명 중 11명. 거의 10분의 1의 확률. 너를 밟아야 내가 올라가고, 내가 떨어져야 네가 데뷔하는 이 잔혹한 판에 내몰린 두 사람이, 과연 서로 좋아한다는 게 가능할까.


쳐음에는 또 그럼직했다. 몇 주간이나 흔들리지 않고 탑 랭커의 자리를 지킨 지훈은, 2, 30위권에 머물러 있는 다니엘의 관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두어도 기어이 솔기를 뚫고 나온다고 하던가. 다니엘은 슬금슬금 어깨를 비집고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직캠 조회수가 터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 거리로 가십에 올랐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훈을 밀어내고 2등까지 치고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아무렇지 않은 여리고 착한 심성만으로 이 잔인한 장기판 위에서 몇 주간이나 1위를 수성하고 있었을 리가 없으니, 그 또한 나름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둘 다.






일이 그렇게 되느라고 그랬는지, 심지어 두 사람은 같은 조가 되었다.


모르는 척,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역시나 제 속을 숨기지 못하고 지훈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퍼부어대는 다니엘과, 한 발 물러나 뾰로통한 태도로 이깟게 다 뭐냐는 듯 틱틱대는 지훈은 꽤 잘 어울리는 페어였다. 가끔은 그 밀고 당김이 지나쳐 이마를 한 대씩 쥐어박아주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크게 겉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었다. 다니엘도 지훈도, 지금 자신들이 어떤 곳에 서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익은 감정은 때로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지금처럼.


“어이, 박지후이.”


다니엘의 목소리가 낮고 둔탁하게 지훈의 귓전을 때렸다. 그 목소리가 전에 없이 싸늘하게 들렸다. 오늘 오전 연습 내내, 동작을 틀리고 박자를 틀리고 심지어 동선까지 엉키는 등 영 연습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지훈이었다. 어젯밤에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성우는 가만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싸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음, 정 반대로, 불타올랐을 수도 있고.


“니는 새끼야, 정신을 어데다 팔고 있노, 지금.”


그러나 그런 지훈에게 쏟아진 것은 다니엘의 전에 없이 차가운 말이었다.


“야, 왜 그래.”


성우가 가만히 손을 뻗어 다니엘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살짝 팔을 들어 그 손을 뿌리쳤다.


적당히 해라-라고 말할 뻔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요컨대, 선수필승이라는 것이다. 지훈이 왜 저렇게 연습에 집중을 못하는지 다니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걸로 말이 나오기 전에, 자기가 먼저 지훈에게 쓴소리를 하는 역할을 밀고 들어가겠다는 속셈일 터였다. 때마침, 리더이기도 하니까.


“니 여 처놀라고 왔나.”


묵직하게 쏘아붙이는 말투는 차가웠다. 놀라울 만큼.


“대답 안하나.”


아무리 그렇기로, 말이 심한데. 성우는 새삼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아가리 처붙었나.”


사장님 나이스샷.

성우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와. 1등 몇 번 하다가 미끄러지고 나니까, 만사 귀찮나.”

“그런 거 아닌데요.”

“그래 죽상 쓰고 있으믄 사람들이 알아서 다시 니 1등 시키준다드나.”

“에이, 왜 그래.”

“말 심하다.”

“그만 해요, 그만.”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던 조원들이 하나 둘 달려들어 다니엘을 말렸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말들을 못 들은 척, 한 마디를 더 했다.


“하기 싫으믄 집에 가라. 안 말린다.”


순간 연습실 안 분위기는 한여름의 낮처럼 조용해졌다. 애써 웃는 얼굴로 다니엘을 말리던 사람들은 모두가 짠 듯이 입을 다물었다. 연습실 안 공기는 건드리면 깨질 듯이 팽팽하게 몰렸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한참 입술을 깨물다가,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듯 연습실을 나갔다.






“다니엘 왜 그러냐.”


싸하게 가라앉은 연습실 안. 형섭과 우진은 입 속으로 한참을 무어라 웅얼대더니 도망치듯 연습실을 나갔다. 이런 싸늘한 분위기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엘 또한 소리 없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열심히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좀 전에 너 말 심했다. 알지?”

“오늘 좀 심하잖아요, 집중 못하는 게.”


사투리는 아니고, 그렇다고 표준어도 아닌 애매한 말투.


그러나 성우는, 다니엘이 지훈에게 말을 걸 때는 거의 표준어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사투리를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경상도 사람에게는 내적인 친밀감이 높을수록 사투리가 섞이는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며칠이나 남았다고.”

“아무리 그래도 하기 싫으면 집에 가라니.”


성우는 어깨로 다니엘의 어깨를 툭 밀었다.


“리더 체면에 금방 숙이는 건 웃기니까, 좀 있다가 저녁 때 풀어.”

“풀기는 뭘 풀어요. 내가 뭐 없는 소리 했나.”

“적당히 해라.”


성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리 가면 되돌아오는 거 힘들다.”






지훈은 세수를 하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실컷 세수를 하고 물기가 좀 가실만 하면 또 세수를 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딴에는 서러웠던 거지. 두 사람의 사이가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그건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을 대하는 지훈의 태도를 보면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결론은 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 좋다는 사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화를 냈다. 서러울 일이다. 열아홉살짜리가 아니더라도.

달래러 온 게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나라서 그건 좀 안됐지만.


“지훈아, 괜찮냐?”


지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눈자위가 안쓰럽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라니까 짜식이. 이렇게 힘 조절이 안돼서 연애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몸 많이 안 좋으면 하루 쉬어. 다니엘한테는 내가 대신 말해줄게.”


성우는 흘끗 뒤를 돌아 연습실 쪽을 바라보았다.


“아, 짜식이. 답지 않게 까칠을 떨고.”

“아니에요 형. 죄송해요. 어제 잠을 좀 못자서 컨디션이 좀 안 좋네요.”

“어디 안 좋냐? 잠을 못 잔다니.”

“아니요 뭐.. 스트레스 받으니까요. 아무래도요.”


그렇지. 그래. 그래.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성우는 지훈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좋게 좋게 말하면 될 걸 왜 버럭질을 처하고 그래. 리더라는 게.”


연신 고개를 수그리는 지훈을 바라보다가, 성우는 슬쩍 연습실 문 쪽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렇게까지나 눈치를 줬으니, 이따 저녁 쯤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풀겠지. 그 사이 몇 시간까지가 살얼음판이겠지만.


문득 슬그머니 외로워졌다.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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