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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6

16. Movie 下

하루 종일 떨고, 긴장하고, 온 몸의 신경을 다 곧추세웠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본무대는 너무도 빨리,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렸다.


춤을 추는 내내 흘끗흘끗, 눈으로 다니엘을 찾았다. 몸을 틀 때 흩어지는 블루진 셔츠의 자락과,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십자가 목걸이와, 잠시 프리즈가 걸리는 동안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애쉬 톤의 머리칼과, 손 끝과, 발 끝과, 팔꿈치, 무릎, 몸의 선을 따라 훑었다.


그루브를 따라 휘어지는 선과, 리듬을 타고 박동하는 몸과, 귓전에 날아드는 그의 목소리까지. 다니엘의 영어 발음은 가끔 그가 사투리를 쓰는 경상도 남자라는 걸 잊게 했다. 지금이 꼭 그랬다. You're too sexy to me. Sexy to me. So sexy. 그 단순한 가사는, 오늘 새벽 열에 들뜬 귀에 들렸던 그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무대에 혼자 있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이 지훈을 안심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2분이 끝났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을 억누르며, 지훈은 대기실로 내려왔다. 무대를 끝내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정말로 잔인한 건 이 부분이 아닐까.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지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거라면 최소한, 귀먹은 욕지거리라도 할 자유 정도는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여섯 명 모두가 똑같이 땀흘려 준비한 무대지만, 이 속에서도 1등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꼴찌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1등을 주지 못할 거라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화를 낼 자유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러지도 못하게.


“떨린다.”


다니엘이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말투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뜻이기라도 한 듯. 지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허공에 흔들리는 그 손을 잡았다.


아주 짧은 순간, 온 우주가 멈춘 것 같은 머뭇거림이 있었다.


다니엘은 따끔한 가시에라도 질린 듯 화들짝, 손을 뺐다. 그 행동은 의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좀 귀엽기도 해서, 지훈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러니까, 지금 나랑 내외하자는 거구나. 어제 자기까지 해 놓고. 그 때 아닌 수줍음에 조금 웃음이 나서, 지훈은 짐짓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보면,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말랑하고 달콤한 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이 곳은 점수를 확인하는 대기실이었다. 이 곳에서 딴 생각을 하는 것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정면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 화면에서 순위 발표 화면이 떠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섯 모두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무엘이가 1등할 거 같아.”


센터에 대한 예우일까.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무엘의 이름은 제일 첫 번째로 화면에 떠올랐다. 6위였다.


순간 대기실 안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여섯이 똑같이 고생하며 준비했지만, 누구는 1등이 되고 누구는 6등이 된다. 1등이 누구일지, 2등이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사무엘이 그에 비해 떨어지게 못했다거나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번호가 매겨지는 것이다. 누구는 1등, 누구는 6등.


다음으로 이름이 뜬 것은 다니엘이었다.


아 씨발, 왜.


저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지훈은 그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와-하는 감탄사를 뱉는 것으로 겨우 눙쳤다. 어떤 꼴을 봐도, 어떤 일을 당해도 일단 말은 한 박자 참고 봐야 한다는, 방송물 오래 먹은 그 나름의 처세술 같은 것이었다.


“...”


흘끗, 눈치를 살폈다. 다니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아주 잠깐 눈을 깜빡거렸을 뿐, 표정이 굳어지지도 않았고 실망한 기색을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은 멤버들의 얼굴을 한 번 쓱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하마터면 그렇게 물어볼 뻔 했다.


리더였는데. 혼자 정말 이런저런 고생 많이 했는데. 동작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말이 많은 멤버들 틈에서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달래며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끌고 왔는데.


그리고, 그 와중의 나는.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어놓고도, 한 번도 살갑게 굴어주지 못했다. 고생한다, 애쓴다는 말 한 마디 해 주지 못했다. 왜 나를 힘들게 하냐고 투정을 부렸고 왜 내 마음대로 끌려와 주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그런 그에게, 다니엘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때리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았고, 쏘아붙이는 말들을 못 들은 체 하지 않고 들어 삼켰다. 끝없이 투정 부리고 짜증내고 징징대는 자신을, 그는 참 끈질기게도 붙들어 끌어안고, 다독이고, 입을 맞추고, 잘못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5위.


그 후로 발표된 등수는 지훈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1위와 2위를 남겨놓고 자신과 우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도, 그 모든 것이 꿈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왜. 왜. 형이 왜 5등인데. 따지고 보면 그 등수는, 그랬다. 다니엘이 5등이 아니라면, 다른 그 누군가가 5등으로 떠밀려 갔어야 맞는 것이긴 했다. 그러나 지훈에게 그런 것까지를 헤아리는 것은 무리였다.


지훈의 순위는 2등이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등을 돌렸다. 굳어진 얼굴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놀라고 기뻐 얼굴을 감싸 쥔 우진의 등을, 지훈도 같이 토닥였다. 우진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이 조에서 가장 순위가 낮은 우진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이 경연을 준비했는지 지훈도 잘 알았다. 그렇게 얻어낸 1위에, 그 어떤 미련도 이의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형은 왜 5등인데?


이 답 없는 의문만이 끝도 없이 지훈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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