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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6

16. Movie 中

경연 준비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을 갈아입고, 머리를 만지는 시간만도 적게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런저런 준비가 끝나고 텅 빈 진공의 시간 속에 내팽개쳐진 채, 막연한 흥분과 불안으로 가득한 심장을 억지로 누르고 다스리며 무대에 오를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 지난 며칠간보다 지금 이 몇 시간이 더 길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하면, 그건 옳은 표현이 될까.


의자에 앉아 뜻없이 발을 까딱거리며 지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흰 상의, 헤어밴드, 무릎 부분이 살짝 찢어진 데미지 진. 좀 더 많이 찢긴 진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지만 나이도 있고 너무 찢어진 진은 곤란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 때, 다니엘이 등 뒤를 스쳐 지나갔다.


다니엘은 얼마전에 머리를 새로 염색했다. 애쉬 톤이 나는 지금의 컬러도 그에게는 썩 잘 어울렸는데, 그래도 가끔 예전의 그 핑크색이 더러 생각날 때가 있었다. 저 형은, 머리 끝은 핑크색이고 뿌리 쪽으로 금발이 흘끗 보여서, 이를테면 로즈 골드 색깔인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무릎이 보이다 못해 허벅지 윤곽이 다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데미지 진에 블루진 셔츠 아래로 흰 티셔츠를 받혀 입고 반쯤 머리를 흐트러뜨려 내린 다니엘은 외국 하이틴 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가만히 눈으로 등 뒤를 지나가는 다니엘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쳐다보았다.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일이다. 뭔가가 변해 있었다. 늘 보던 그 얼굴인데, 늘 알던 그 사람인데 등 뒤로 지나가는 그 실루엣에 이미 마음이 설렜다. 저도 모르게 지훈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안녕. 그렇게 말하듯, 살짝, 거울에 비친 손을 흔들었다. 다니엘은 뭐라도 줍는 듯 슬쩍 허리를 숙였다가, 지훈의 손 끝을 살짝, 그러나 제법 힘을 주어 꽉 한 번 잡았다 놓았다.


“저기, 시작할 때 조명 있잖아요.”


팀의 리더인 그는 오늘 유독 정신이 없었다. 멤버들의 의상과 소품을 챙기는 것도, 조명이니 음향을 이야기하는 것도, 음원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도 모두가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등 뒤로 멀어져가는 다니엘의, 그래도 평소 자신에게 말할 때에 비해서는 훨씬 사투리의 억양이 줄어든 목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아직도 온기가 남은 자신의 손 끝을 만지작거렸다.






떨려 죽겠다. 어떡해.


사실은 별로 떨리지도 않는 얼굴을 하고 호들갑을 떨며, 청바지의 찢어진 틈으로 훤히 보이는 무릎을 달달달 떠는 성우 때문에 지훈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저 형은, 무대 나가면 제일 안 떠는 사람이 꼭 저러더라고.


벌서 한참 전에 다 마시고 이젠 얼음만 남은 아메리카노 컵에 꽂힌 빨대를 휘저어, 얼음이 녹은 물을 한 모금 빨아마셨다. 딱히 먹은 것은 없는데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긴장했기 때문일까. 고개를 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조 뿐만 아니고 다른 조 멤버들 또한 부산스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머리가 지그시 아팠다.


그냥, 뭐가 됐든, 빨리 하고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그 순간 턱 하고, 누군가가 지훈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화들짝 눈을 떠 보니 다니엘이었다. 지훈은 고개를 모로 돌려 등 뒤에 선 그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입을 열어 부르는 음성은 부자연스럽게 울려나왔다.


“잠깐 좀 보자.”

“무슨 일인데.”

“별 일 아이다.”


지훈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 서서 밖으로 나가는 다니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한 번 흘끗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은.”


다니엘은 손을 들어 지훈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니 보고 싶어서 불렀지.”

“보는 거야 안에서도 보면 되잖아.”

“내만 보고 싶으니까 불렀다. 떫나.”


다니엘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지훈을 한참이나 위 아래로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왜요? 뭐 이상해?”

“아니.”


다니엘은 싱긋 웃었다.


“이뻐서.”


이 사람은, 가끔 잘 모르겠다. 숨도 못 쉴 듯이 몰아붙이는 듯도 하다가, 이럴 때 보면 지나치게 조심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지나치게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또 가끔은 너무 솔직하기도 해서.


“그런데 좀 심심하기는 하다.”

“심심하다고? 목걸이 했는데.”

“한 개 정도 더해도 이쁘겠다.”


다니엘은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지훈에게 건넸다.


“뭐 치렁치렁 하고 댕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제. 그래도 드레스 코드가 이러니까, 좀 걸치는 거도 나쁘지는 안하겠다.”


다니엘은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귀걸이며 목걸이며 팔찌며, 한 개도 아니고 두 개 세 개씩 과하다 싶을 만큼 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 그에게는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이 것은, 그런 그의 목걸이 중 하나였다.


“이거 나 주면, 형은.”

“내 거는 따로 있고.”

“걸어줘.”


지훈은 툭 내뱉듯 말했다.


“줄 거면 걸어주든가. 물은 셀프야?”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목걸이의 체인을 열고, 그 목걸이를 지훈의 목에 둘러 주었다. 별다른 펜던트 장식이 없는 체인 목걸이였다. 이미 걸고 있던 가는 목걸이 위로 걸린 두터운 체인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조금 더 날라리가 된 것도 같다.


“이쁘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헤어밴드 아래로 드러난 이마에 다니엘은 살짝 입을 맞추었다.


“오늘 잘해라. 나도 잘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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