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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6

16. Movie 上

눈을 뜰 엄두가 나지 않아 지훈은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 밑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따가웠다. 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꼭꼭 숨기고 있던 아픈 데를 건드려지기라도 한 듯,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렇게나 울고, 새삼 눈을 들어 다니엘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훈아.”


아직도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가만히 손 끝으로 쓸며, 다니엘은 말을 걸어왔다.


“솔직하게, 오늘 별로 사고치기 좋은 날은 아이다. 내일 경연이고.”


사실은 그 이유도 있었는데.


그 말이 입 속을 맴돌았지만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사실은 무섭고 불안했다고. 누구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 갖고 싶었다고. 그 입에서,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사실은 제법 간절했다고.


“내가 좀 더 참았어야 되는 게 맞는데, 그 말은 안 하께.”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자자거나, 하자거나, 그런 말이 아니라, 내게 져달라는 말을 고른 것은 그래서였다. 그래야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야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은 후회한다. 그것조차, 이 사람에게는 짐인 것 같아서.


“지훈아. 니 내 좋나.”


조금은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다니엘은 둔탁하게 물어왔다. 문득 부끄러워져, 지훈은 기껏 감은 눈을 좀 더 꼭 감고 다니엘의 품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심각하게 묻는 기다. 대답해 봐라. 니 내 좋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분위기여서 지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아직은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니엘이 하는 것 같은 그런 에두르지 않은 말은, 아직은 무리였다. 옷을 벗고, 속살을 보이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의 골을 온전히 그 손에 내맡긴 후에도, 아직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내도 니 좋아하는 거는, 알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서설이 거창할까. 지훈은 품속에 고개를 묻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니하고 내하고 오래 볼라믄, 내일 잘해야 된다.”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늦은 새벽처럼 어둑했다.


“어쨌든 여 끝까지 남아서, 같이 데뷔해야 된다. 그거밖에, 니하고 내가 오래 볼 방법이 없다. 맞제.”


문득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져 왔다.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래서 지금 마음이 안 좋다.”

“왜.”

“내일 춤출 아를, 이렇게.”


다니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전에 없이 착잡한 표정이 그 위를 스쳐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훈이 그를 보아온 모든 순간 중 가장 어른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겠나.”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이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 것을 지훈은 느꼈다.


어제까지였다면 앞뒤 없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왜 지금, 이런 순간에, 그가 이런 말을 하는지 다는 아니라도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는 그 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까지.


“씨발, 나 무시해?”


품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눈에 힘을 주어 똑바로 떴다. 지금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자신다울 필요가 있었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돌려지는 다니엘의 시선을, 지훈은 똑바로 마주했다.


“2등 한 번 하고 나니까 나 되게 우스워 보이나 보다, 형은.”


속 편하게, 하는 것도 없이 편하게 1등 먹었다는 말도 있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3분 남짓한 노래 중 클로즈업샷은 언제 어떻게 얼마나 들어올지 모른다. 감히 자부하기로, 그는 그 사실을 이 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시작된 후 몇 주간이나 수성했던 1위 자리는 그에 대한 나름의 노력에 대한 보답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게 아이고.”

“형 다음 순위 때 나보다 밑이면,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생각해 보면, 거기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 사람과 내가,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미로 속으로 엮여들기 시작한 것은, 그 말 한 마디의 마법이었다. 날마다 경쟁하고, 날마다 비교당하고, 그렇게 하루에 한 뼘씩 마음이 깎여나가는 이 곳에서, 과연 이런 무른 감정을 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지훈은 그 마법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뭐 받고 싶은데.”

“형.”


식지로 어깨를 슬쩍 밀었다. 아무지게 틀이 잡힌 어깨는, 슬쩍 미는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음 순위 때 형이 내 밑이면.”


눈을 피하지 않고, 지훈은 말했다.


나는 형을 좋아하는 거지 형을 걱정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형이랑 같이 가고 싶은 거지 형을 따라가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러니, 걱정 따윈 집어치워요.


“자요. 다시. 나랑.”


가만히 지훈을 바라보던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문득, 이 새벽에 일어난 모든 일이 산란한 꿈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허리에 얹힌 다니엘의 손가락을 손 끝으로 가만히 더듬었다. 그 커다란 손이 소리 없이 움직여, 지훈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껴 잡았다. 손바닥에 밴 땀이 옮겨 묻었다. 손가락 끝으로 손등을 더듬었다. 비슷하게, 제 손등을 훑어오는 다니엘의 긴 손 끝이 은근히 야하다는 생각을 지훈은 문득 했다.


그러면 만약에, 다니엘의 순위가 이번에도 자신보다 높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차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는 같을 거라는 생각에 지훈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래도 저래도 결과는 같은 내기라니. 이런 걸 과연 내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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