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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5

15. 너 아니면 안돼 上

다니엘이 리더에 자원한 건 지훈에게는 조금 의외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어려서부터 방송국 물을 먹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겪어본 지훈이 보는 다니엘은 그랬다. 남들과 쉽게 어울리고 쉽게 친해지는 성격인 것까지는 사실이었지만 리더라는 역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잔소리나 뒤치다꺼리, 쓴소리 같은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역할 자체가 그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는 듯이 보였다. 그런 그의 성격을 알기에, 일전에 한 번 모두의 앞에서 자신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도 그 부담을 이해하고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리더는 다른 사람이 하고 그 리더를 도와주는 편이 다니엘에게는 훨씬 어울리는 역할일 거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지훈의 생각은 별로 틀리지 않았다.


다니엘은 리더를 맡고 나서 컨디션이 많이 다운되었다. 웃음도 많이 없어지고 평소의 장난끼도 확 줄어들었다. 그렇기만 하면 다행인데, 여기서 다운된 컨디션이 춤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안무 수행력이 현격하게 떨어진 게 지훈의 눈에까지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위권 랭커들만 모인 팀이니까. 거기다 안무 가능자가 세 명에, 한 명은 리더, 한 명은 센터, 한 명은 이 조에서 제일 절박한 사람이었다. 양보라는 게 애초부터 나오기 어려운 그림이었고 그 사이에 치인 다니엘은 내심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별로 깰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지훈은 새벽 무렵 잠에서 깼다. 핸드폰 액정을 켜 보니 새벽 2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내일이 경연날인데, 이렇게 애매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버린 것에 일단은 짜증이 버럭 났다.


10분 정도, 지훈은 이불을 둘러쓰고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그러나 한 번 달아난 잠은 쉽사리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숨소리, 이불이 스치는 소리, 누군가가 끙끙 앓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잠을 방해했다. 제가 앓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밖으로 나왔다던 다니엘의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다.


결국 지훈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방 밖으로 나갔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세수라도 하고, 마음을 추스른 후에 잠을 청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지훈은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세면대 옆 타일벽에 다니엘이 이마를 기대고 서 있었다. 숙인 콧날을 따라 물이 뚝뚝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몹시 지쳐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뭐해.”


손가락으로 팔뚝을 쿡 찔렀다. 눈꺼풀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눈을 떠 지훈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벽이랑 연애해요?”


그 말을 듣고서야 다니엘은 실눈을 뜨고 지훈을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얼굴이 좀 축난 것 같기도 했다.


“말 난 김에 벽이랑 연애나 하까. 기대 있으니 좋네.”

“하긴 형 정도 덩치가 기대려면 벽 정도는 돼야 할 거야?”

“니가 벽 좀 해 줄 생각은 없나.”

“깔려 죽는 건 사절이라?”


시시한 농담을 건넸다. 다니엘 역시 피식 웃었다. 우스워서 웃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네 말을 듣고 있다는 표시 정도인 가벼운 웃음이었다.


“이미 다 끝난 얘기긴 한데, 리더 꼭 형이 했어야 하나.”


지훈은 손을 씻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형 힘든 거 속상한데.”


다니엘은 리액션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말을 하면 뭔가 드라마틱한 반응이 올 거라고 슬그머니 기대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반응이 무덤덤했다. 입가로 아주 엷은 미소 정도를 겨우 띄울 뿐이었다.


“맞나.”


착 깔린 그 목소리는 묵직했다.


“조별 평가 때 종현이 형이 디게 멋있었거든.”


납득한다는 듯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는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아마 지금의 조만큼이나 유명했을 것이다. 특히나 그 조의 리더였던 종현은 정말 싫은 소리 한 마디 안하고 모든 조원들을 다 끌고 가는 걸로 정말 유명했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는 제일 어리서, 이번 아이믄 영 해 볼 일 없을 줄 알고 손들었더마는.”

“형이 막내야?”


지훈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와. 내는 막내 하믄 안되나.”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되게 안 어울린다.”

“니는 도대체 내를 우째 생각하믄 그런 말이 나오노.”

“음... 곰?”


말 끝에 새삼 우스워져서 지훈은 한참이나 소리 내어 웃었다.


“형은 형이 너무 어울려서 동생 같은 거 평생 안 해봤을 거 같아요.”

“욕인가 칭찬인가 분간이 안 가네.”

“그러게. 욕일까 칭찬일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지훈은 돌아섰다. 벽에 기대선 채 눈을 감은 다니엘의 얼굴에, 손을 씻고 남은 물기를 톡 튕겨 뿌렸다.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다니엘은 천천히 눈을 떠 지훈을 바라보았다.


“형.”


지훈은 그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혹시, 불안해요?”


언젠가도 했던 질문. 그러나 오늘은 그 무게가 다르다. 그 때가 막연했다면 지금은 명확하다. 그 때가 멀리 있었다면 지금은 눈 앞에 와 있다. 뭐가 뭔지, 이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1차 경연과, 이미 반 가까운 숫자가 사라져 버린 지금은 그 무게부터가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답 안 하네.”


지훈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르지. 형은, 정곡을 찔렸는데 맞다고 대답하기 힘들면, 그냥 대답을 안 해.”

“맞나.”


다니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런 거를 다 알고.”


그 말은 뜻하지 않는 곳에서 지훈의 마음을 찌르고 지나갔다.


좋아한다고, 술김이지만 분명히 말했는데.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도 없는 와중에 다니엘에게 끌려 숙소로 돌아온 다음날, 제가 술김에 내뱉아 버린 지나치게 솔직한 말들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들은 다니엘은 무덤덤했다. 그는 지훈을 놀리지도 않았고 그 말을 들은 것으로 으쓱대지도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아무 것도 듣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무덤덤하고 평온하게 지훈을 대했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은, 그래서였다.


내가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왜 꼭 그런 식으로, 피해 가요?”

“뭐를?”

“형은 내가 좋다며. 내가 형 좋아하는 건, 이상해?”

“뭐?”

“가만 보면, 형은 내가 형을 좋아할까봐 무서운 것 같아.”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저 아주 많이 조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그러나 결국은 섭섭했다. 그뿐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려는 생각 같은 건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형 좋아하면, 안 돼요?”

“지훈아.”

“나 불안해.”


이렇게까지 말해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말해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오는 대로 말할 밖에. 숨기지 말고, 센 척 하지도 말고.


“우리가 여기서 데뷔를 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난 할 거거든. 형도 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만일에 여기서 데뷔를 하지 못한다면, 그 때는 더더욱.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손 뻗으면 닿을 곳에서, 내 것이지도 않고 내 것이 아니지도 않은 이 상태를, 언젠가 형이 말했던 아주 쓴 커피를 머금듯, 즐기고만 있는 순간도 조만간 끝나버리지 않을까 하고.


“형을 좋아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기겠지. 나한테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고. 그렇게 돼도, 형은 나를 좋아해 줄까.”

“그게 무슨 말이고.”

“그러니까, 불안하다고. 난.”


지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러다 말아버릴까봐.”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의 초리가 긴 눈이 똑바로 뜨여져 지훈을 향하고 있었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모두 사라진 그 눈은 진지했고, 냉엄하기까지 했다.


“말 배배 틀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알아먹기 쉽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고, 니.”

“확인시켜 줘. 내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내 거라고.”


지훈은 대답 대신 벽에 기대 선 다니엘의 어깨를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놓인 즈음에 쇄골뼈가 옷 아래로 만져졌다. 쓸듯이 그 쇄골을 만졌다. 끌려가듯, 끌려오듯 지훈은 뚫어지게 자신을 보는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나한테 져 줘요.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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