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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4

14. 딱 좋아

한참 피 끓는 나이의, 소년 혹은 청년들만 수십 명을 모아놓은 합숙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규칙이 필요했다.


원칙적으로는 술도 담배도 무단외출도 모두 불가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데 많은 제작진이나 참여한 연습생들 모두 그런 소소한 규칙을 지키는 데까지 쓸 신경은 없었다. 그러나 제작진 측에서는 이 규정을 어기는 바람에 생기는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 서슬에 혹시나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까 두 번 세 번 연습생들을 단속하는 것은 오히려 기획사 쪽이었다.


“형.”


지훈이 불쑥 다니엘에게 술 한 잔 사달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연습이 막바지에 치달아가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 술 한 잔만 사 줘요.”


이 팀 조원 중에서 합법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건 성우와 다니엘 두 사람 뿐이었다. 평소에도 유독이나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은 가끔 연습 마치고 난 후에 슬쩍 나가서 맥주 한 캔 정도를 마시고 들어오곤 했는데, 지훈은 이 대수롭지 않은 유대가 은근히 부러웠다.


“머라카노.”


그러나 다니엘의 반응은 의외로 강경했다.


“담배 안 피우는 거 이쁘다 했더마는 술은 무슨 술이고.”

“어차피 좀 있음 먹을 건데.”

“어차피 좀 있으믄 누가 묵지마라 해도 묵을 거 아이가. 좀 참았다가 나중에.”


지훈은 흘끗 곁눈으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의 의외스러운 점은, 이런 부분이다. 허술한 듯 해서 푹 찔러보면 의외로 말이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생각인 건 아니었지만.


“처음 마시는 거 형이랑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 말에 어림도 없다는 듯 하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나 ‘버튼’을 찾은 것 같았다.


“맥주 딱 한 캔만. 진짜루.”






맥주 딱 한 캔만. 일단 약속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과연 이런 짓을 해도 되는가 하는 회의감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뭐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애한테 맛이 간 것부터가 이상한 거였지만.


오늘 외출의 명분은 비상 식량 확보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플 나이여서, 제때 때맞춰 나오는 밥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원래는 그것도 안 되는 거였지만, 연습생들은 각자 빵이니 과자니 컵라면 같은 것들을 숙소 벽장 같은 데 몰래 들여놓고 암암리에 꺼내먹고 있었다. 다니엘의 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고 나온 백팩 한 가득 주전부리들을 쑤셔 넣고, 마지막으로 담배 두어 갑과 맥주 서너 캔을 샀다.


합숙소가 내려다보이는 둔덕의 층계참에 앉아 두 사람은 맥주를 한 캔씩 뜯었다. 그새 좀 흔들렸던지 뽀얀 거품이 넘쳐흐르는 캔 입구에 서둘러 입을 대었다.


“진짜 술 처음 묵나.”

“그렇다니까.”


다니엘은 지훈이 든 맥주캔에 제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


“데뷔하자.”

“형도.”


멋없는, 그러나 그만큼 간절한 건배사였다.


지훈은 탄산 음료라도 마시듯, 제법 홀짝홀짝 맥주를 들이켰다. 그 모양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다니엘은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지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소감이 어떻노.”

“별로 맛 없다.”


지훈은 콧잔등을 찌푸려 보였다.


“별 거 아닌데.”

“원래 그렇다.”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어른 그거 뭐, 막상 돼 보믄, 별 거 아이더라. 별로 틀려지는 거도 없고.”

“근데 형은 왜 그래.”

“내가 뭘.”

“애라서 안 된다며. 자는 거.”


그 느닷없는 말에 마시던 맥주가 목에 걸려, 다니엘은 한참을 콜록거렸다.


“끼어들기 할 때는 깜박이 필수다.”

“뭔 소리야.”

“훅 들어오지 마라고, 새끼야.”


다니엘은 손을 뻗어 지훈의 이마에 손 끝을 가볍게 튕겼다.


“누구는 좋아서 참는 줄 아나.”






맛없다, 별로다, 이거 왜 먹는지 모르겠다 하면서도 지훈은 맥주를 꽤나 홀짝홀짝 잘 마셨다. 나중엔 마시다 남은 다니엘의 맥주까지 빼앗아다 자기가 다 마셨다. 딱히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술이고 공식적으로는 먹으면 안 되는 걸 먹는 게 좋은 거겠지 싶어 다니엘은 웃으며 반 이상 남은 자신의 맥주를 순순히 뺏겨 주었다. 그 역시도 다 겪어본 시절의 이야기였다.


핸드폰을 꺼내 슬쩍 액정을 켜 보았다. 시간이 어지간히 기울어져 있었다.


“자, 은자 묵을 것도 다 묵었고, 드가자.”


그러나 옆에 앉은 지훈은 고개를 떨구고 앉은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이.”

“...”

“야.”

“...”

“박지후이.”


두 번 세 번 부르니 그제서야 고개를 드는 그 얼굴은, 연지곤지라도 찍은 것처럼 광대뼈 주위에 홍조가 잔뜩 올라 있었다. 게다가 그 큰 눈이 살짝 풀려 초점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이미 그 표정부터가 이미 잔뜩 풀려 보는 사람을 심란하게 했다. 아무리 첫 술이라지만 마신 게 고작 맥주 서너 캔 정도인데 이렇게까지 취하나 싶어 다니엘은 짐짓 당황했다.


“지훈아.”


지훈은 그 큰 눈만 껌뻑거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 앞에 손을 흔드니 그 손을 따라 눈은 움직이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야, 정신 좀 채리라.”


슬며시 어깨를 잡아 흔들자 어린 몸에 그에 따라 휘청휘청 흔들렸다. 이래 가지고, 걸어갈 수는 있나. 그러게, 한 캔만 먹기로 해놓고 그 이상 먹이는 게 아니었는데 싶어 다니엘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떡하지.


“으응.”


그 때 지훈이 겨우 입을 떼었다. 한참이나 눈을 깜박거리며 다니엘을 쳐다보다가, 지훈은 그 큰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게 웃었다.


“우와, 니엘이 형이다.”


뭐라고?


다니엘은 멍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나름 나이 치고는 어른스럽고 차분했고, 짧지 않은 방송가 짬밥 때문인지 모질고 독한 면도 없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보다도 어른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는 지훈이었어서, 맥주 몇 캔에 이렇게 헤롱거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군데에, 형아 여기 왜 이떠요?”


초점은 좀 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고 예쁜 눈으로 다니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훈은 혀짧은 소리로 물어왔다.


“형아누운, 진영이 이뽀하자나요.”

“진영이?”


잠깐 접촉 불량인 형광등이 된 기분으로 다니엘은 눈을 깜박였다. 진영이? 배진영? 걔가 왜?


“형아가, 구랬잖아요. 요기서, 쩨-일 이쁜 거, 진영이라구우.”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삐죽거리다가, 한 발은 튀어나왔다.


“지훈이 그 말 듣고 상처 받았다느은. 쳇.”


아, 그게, 그러니까. 그 비주얼 센터 투표 때.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고 입을 틀어막았다. 이 흔치 않은 장면을, 정말 이대로 스쳐 지나가야 하는 건가. 동영상이라도 찍어야 하는 거 아닌지.


“구로니까아, 그거 다 거짓말이라는 말이잖아요? 지훈이가아, 여기서 쩰루 이쁘다고 했던 거.”

“...”

“구로니까아, 형아누운, 진영이한테에, 가라구.”


지훈은 제법 단호하게, 저 아래 합숙소 쪽을 가리키다가, 아랫눈자위를 손가락으로 까뒤집으며 낼름 혀를 내밀어 보였다. 메롱, 하는 소리는 덤으로.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동영상 찍어야 돼. 동영상.


아니.

그냥 나 혼자서만 보고 싶어. 이런 거.


“그래서, 삐낐나.”

“웅.”

“미치겠네.”


다니엘은 퉁퉁 부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숨카놀라고 그랬지. 그런데 머 소용없대.”


취기 오른 녀석이 이런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꽃은 남의 눈에도 꽃이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든지 촛점이 나간 눈을 하염없이 끔벅거리며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실없이 웃음이 났다.


“가지가지 한다.”


이 자식 진짜, 보면 볼수록.


“아 씨발, 코피 터지네 진짜.”


가끔은 이렇게, 조금은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겠지.

애써 못 그러던 것을 맥주 한 캔 핑계로 풀어진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야, 야. 인나라. 드가자. 이라다가 밤 새겠다.”

“힝입니당.”


어깨를 들썩거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쭉 뻗은 팔로 아기들이 잼잼이라도 하듯 손을 쥐었다 폈다 바둥거리며 지훈은 울 듯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알았다. 알았다. 더 이따가 가자.”

“히힛.”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제는 다니엘의 팔을 붙들고 뺨을 부비적거렸다. 당황스러운 것을 지나, 그간 이러고 싶어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치밀었다. 아무리 취중이라지만, 속에 없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텐데.


“형아.”

“와.”

“형아.”

“와.”

“형아.”

“고만 불러라, 정든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별로 웃긴 말도 아닌데 혼자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빨갛게 홍조가 오른 뺨은 살짝 열이 올라 따끈따끈하기까지 했다. 그 얼굴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다니엘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만히 지훈을 보고만 있었다.


“니 뭐가 그래 좋노?

“형아가.

“뭐?

“나 형아 디게 많이 좋아해... 몰르지?”


이 자식은 어쩜, 술 취한 중에도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그렇게 한참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떠들며 재잘거리다가, 지훈은 시든 꽃처럼 다니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폭 잠이 들었다. 평소 지훈이 잠들던 시간보다 한참은 지난 시간이었다. 그걸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다니엘은 꽤 늦은 시간까지 지훈의 머리를 어깨로 떠받힌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잠든 걸 깨우고 싶지 않아서.

지훈이 깨어나면, 다시는 이런 얼굴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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