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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3

13. 나야, 나 下

“뭐하는 거야.”


지훈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손등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입을 맞추다 못해 혀끝으로 슬쩍 핥는 감촉은 야릇하기까지 했다. 슬그머니 기분도 이상해지고, 조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가 잡히는 것도 어색했다. 지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냥 붙잡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가 저릿해올 정도로 힘을 주고 꽉 잡고 있었다. 어색해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손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손은 빠지지 않았다. 힘을 주면 줄수록 손을 틀어쥔 다니엘의 악력은 점점 더 세어지는 느낌이었다.


“형, 저기.”


다니엘은 손마디가 질리도록 꽉 잡은 지훈의 손을 끌어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 핥았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갔다. 왜 새삼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졌다. 손에 키스 좀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제법 깊은 키스도 몇 번이나 했고, 아예 대놓고 몸을 만져본 적도 있었다. 그런 주제에, 왜 지금 이 별 것도 아닌 스킨쉽에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일까.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저기... 갑자기 왜...”


그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다니엘은 지훈의 손을 살짝 깍지 끼어 잡고는 식지와 중지 사이를 슬쩍 핥았다. 딱히 민감하지도 않은 그 곳을, 세운 혀 끝으로 몇 번이나, 애무하듯이. 순간 눈 앞이 하얗게 질렸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 비슷한 게 나올 뻔 해서 지훈은 허겁지겁 입속 살을 깨물었다.


“하지 마요.”


결국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기분 이상해.”

“이상해야지. 이상하라고 하는 짓인데.”


다니엘은 지훈의 두 번째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었다. 상황 종료라고 선언이라도 하듯이,


“쓸데없는 골질 하지 말고 연습이나 열심히 해라. 알겠나.”






그것이 이렇다 할 답도 없고, 당장 그 답을 찾을 수도 없는 문제-내 춤이 마음에 안 든다-를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게 주는 다니엘의 대답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은 얼른 잊고 연습이나 집중하라는.


그러나 그 해답에는 또다른 부작용이 있었다. 그 ‘순간’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연습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깐 쉬다가도, 다니엘과 눈만 마주치면 얼굴로 피가 쏠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속을 빤히 다 아는 듯 쳐다보는 그 눈과 마주치면 아까 그 순간의 가슴이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순식간에 피어올라 지훈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겨우 그 날의 연습이 끝났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방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더 맞부딪힐 일이 많아질 터였다. 연습실보다 훨씬 더 좁은 방 안에서, 씻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이런 저런 농담을 하거나 격의 없이 손을 뻗어 툭 때리거나,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한다면. 그래도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붙들고 있는 냉정을, 그 상황에서까지 지킬 수 있을지 지훈은 자신이 없었다. 결국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핑계를 대고, 지훈은 혼자 연습실에 남았다.


텅빈 연습실에 앉아, 지훈은 뜻없이 태블릿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뭔가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훈은 그냥 그렇게 눈에도 마음에도 남지 않는 동영상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쯤에는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불이 꺼진 방 안은 캄캄했다. 약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더러더러 들렸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벽을 더듬었다. 이렇게 캄캄한 방 안에서 차마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일찍 와서 잠이나 잘 걸 그랬다고, 지훈은 후회했다.


순간, 누군가가 덥석 지훈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제대로 된 비명도 아니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하며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이었다. 별 일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덕분에 다시 기껏 식혀놓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다급히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침대로 뛰어들려는데, 다니엘이 그런 지훈의 손을 붙잡아 그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why]

너, 왜 그래?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차라리, 조용하게 왜 그러냐고 물었으면 좀 나았을까. 하필 붙들린 곳이 손이었다. 손바닥 위에 글자를 쓰는 그 감각에 애써 외면하던 오늘 아침의 그 기분이 되살아나 버린 것도 그리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니엘이 쓴 why라는 글자가 뜨겁게 달군 낙인처럼 손바닥을 파고 드는 기분이었다. 이런 저런 것들이 동시에 머리 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지훈은 있는 힘껏 다니엘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갈 만한 곳이 화장실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찬물을 틀고 두 번 세 번 세수를 했다. 나중에는 숫제 세면대에 물을 받고 고개를 처박았다. 얼굴만이 아니라 머리칼과 티셔츠 목둘레까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되고 나서야 조금은 뛰던 가슴이 잦아들었다.


“뭐라 그러지.”


차라리 자기라도 한 후라면, 그래서 그랬다고라도 하지. 아무 것도 아닌 그까짓 스킨쉽에 하루 종일 들떠서 정신 놓고 헤롱거리는 꼴이라니. 창피했다. 낯이 뜨거웠다. 뭘 어째야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몰라.


지훈의 답은 결국 그것이었다. 소매로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물을 대충 훔쳐내고 지훈은 밖으로 나왔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겠지만, 피곤하니까 내일 얘기하자고 그래야지.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바깥에는 이미 다니엘이 와 있었다.


정말로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면 화장실 안까지 따라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도 않았다.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선 채, 지훈이 제 속을 다 가라앉히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니 내일 이야기하자는 핑계 같은 것을 듣자고, 저기서 저렇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니엘은 이리 좀 와보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지훈을 불렀다. 지훈은은 쭈뼛거리며 그 앞으로 갔다. 차마 똑바로 볼 용기는 아직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이 민망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와.”


다니엘은 싱긋 웃었다.


“내 좀 꼴리나.”


지훈은 그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의 미묘한 떨림은, 이미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뭔가가 격렬하게 가슴 속을 치달아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침에도, 하루 종일도, 지금 이 순간도. 지금 이 순간을 형용할 말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 엄두도, 눈을 맞출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말 좀 해 봐라. 목소리 좀 듣게.”


그런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니엘은 그렇게 대답을 재촉해 왔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아무 말도 안 나와서, 지훈은 고개를 떨군 채 잘근잘근 입술을 물어 씹었다.


“몰라.”


한참이나 입술만 들먹거리다가, 겨우 지훈이 한 대답은 그것이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반쯤은 오기로, 한 번 해 보자고 달려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심장은 솔직하니까. 하루 종일, 거울에 비친 시선만 마주쳐도 rpm이 올라가던 이 박동이 진짜일 테니까. 이렇게 오기를 부리고 떼를 쓰고, 뻗대는 지금이 아니라.


“형 못 쳐다보겠어.”


어처구니없이 솔직한 기분으로, 지훈은 그렇게 말해버렸다.


“힘들어. 쳐다보는 것도, 눈 마주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전부 힘들어요.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 그냥, 다 힘들어.”


다니엘은 말없이 그런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뻗어 지훈의 명치 위, 심장 위에 댔다. 그 별 것 아닌 걸로도 뜨끔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손바닥의 온기가 가슴 한가득 밀려들어서, 또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영광이다.”


다니엘은 웃으면서, 그러나 담담하게 말했다.


“니같이 이쁜 놈이, 내한테 꼴려 주서.”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다. 이 낯선 감정에, 그런 감정들을 입 밖으로 꺼내 다른 누군가와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럼.”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지훈은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어째 되기는.”


다니엘은 웃었다.


“내는 니하고 자고 싶고, 니는 내한테 꼴리고, 그런 사이지.”


그러면 그냥 자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더럭 자신이 없어졌다. 이미 자고 싶다는 말까지 다 해버렸던 것 같은데. 거기서 다니엘이 참아주지 않았으면 이미 벌써 무슨 일이 났어도 났을 텐데. 그런데 왜 겁은 지금 나는 건지, 스스로의 마음이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 왜 겁나지.”

“겁?”

“응.”

“내가?”

“아니. 내가.”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다니엘은 한참이나 그런 지훈을 바라보다가 팔을 벌렸다.


“일로 온나. 그래 섰지 말고.”

“...”

“안아주께.”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훈은 미적미적 다니엘에게 다가가 안겼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한참이나 가쁘게 들숨날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은 뛰다 뛰다 쥐라도 났는지 아까부터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머리는 멍하고, 가슴은 터질 것 같고, 그런 와중에 뒷덜미를 타고 온 몸이 간질거리는 듯한 감각이 아름아름 퍼졌다.


“고마 즐기라.

“응?

“즐기라고. 디기 쓴 커피 마실 때 같이. 입 안 가득 물고, 삼키지 말고, 즐겨 봐라. 이 순간을.”


허리를 붙든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원래 소풍은 가서보다 가기 전날이 더 설레는 거 아이가.”


그제야 지훈은 깨달았다. 정작 자신은, 다니엘에게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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