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Time Light 12.5

번외. Be Well

그 이름이 그렇게 빨리 불릴 줄은 몰랐다.


멍하게 얼어있는 사이, 다니엘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무대 앞으로 나가 서 있었다. 투표해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경솔했던 행동에 대한 사과, 느닷없이 주어진 ‘표준말’ 인사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멘트들을 담담히 마치고 제 자리로 올라가 앉았다.


그 후로 잠시, 기억이 감광되었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1위 후보에 올라갔던 것, 이런 저런 질문을 받고 뭔가 대답을 했던 것, 결국은 3위로 이름이 호명되었던 것까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몸에 밴 습관의 힘으로 미소를 짓고, 흠 잡히지 않을 법한 대답을 했다.


떨리는 걸음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3위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빼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8위 자리는 바로 앞 단도 아닌 그 앞단, 자신의 자리와는 정 반대편이었다. 키 크고 어깨 넓고, 그래서 어지간하면 보일 텐데도, 지훈이 앉은 자리에서는 다니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핑크색일 땐 그걸로라도 찾겠더니, 지금은.


이상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뭔가가 지독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났다. 우는 사람과 다독이는 사람, 미안해 하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이 엉켜 스튜디오 안은 오랫동안 시끄러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훈은 스튜디오를 나섰다. 적어도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아무 생각 않고 푹 자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또 이렇게, 한 단락이 끝났다. 내일부터는-


순간, 지훈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저만치 앞에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다니엘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회색 가쿠란의 등쪽 솔기가 시리도록 눈에 익었다. 그리고 그제야 지훈은 떠올렸다. 조금 전 심장을 파고들던 그 싸늘한 위축감을.


“형.”


입을 열어 불렀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다도 아니고 반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늘 알던 그 얼굴인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마음까지 그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뒤따라오던 지훈이 자신의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와.”


다니엘의 앞까지 온 지훈이 걸음을 멈추자, 그는 그제야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나 막상 가는 사람을 붙들어 놓기까지 한 것 치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지훈은 한동안 고개만 주억거렸다.


“불렀으믄 말을 해라.”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원래도 그랬던 듯도 하고 오늘따라 조금 더 가라앉아 있는 듯 여겨지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맞을 것이었다. 새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지훈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씹었다.


“등수 왜 그래.”

“뭐?”

“형 등수가, 왜 그러냐고.”


다니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내가 아나.”

“무슨 대답이 그래요? 형이 모르면 누가 아는데.”


말 끝에 날이 섰다. 이럴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입술이 들먹거렸다. 오늘밤 정말로 속이 상했던 다른 이야기는, 사실 이 사람 앞에서 함부로 해도 되는지 아닌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 얘기를, 두 번이나.”

“됐다. 고마해라.”


다니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할 만 하니까 한 거다.”

“그래도.”

“됐다.”


다니엘은 왼손 둘째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고 쉿-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했든 잘못했든, 벌써 한 말 주서담을 수도 없고.”


여보란 듯 다니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이 사람은, 정말로 이 정도로 그냥 다 잊어버리고 넘어가려는 것이다. 보는 내가 이렇게 속이 상한데도. 보는 내가 이렇게 가슴이 쓰린데도. 남의 일인 양, 아무 것도 아닌 양 그렇게.


“그러는 니는, 임마. 등수가 와 그 모양이고.”


다니엘은 웃었다.


“비켜 달라 해서 비켜줬다 아이가. 그런데 와 1등 못했노, 니는.”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시큰해 왔다. 견딜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오늘밤 일어난 일들이. 그걸, 저렇게만 말하고 웃어넘기려는 이 사람이.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야.”


다니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니가 와 우는데?”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축축히 젖기 시작한 눈을 억지로 크게 치뜨고, 지훈은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희뿌옇게 번지기 시작한 시야 너머 다니엘의 실루엣이 흐리게 뭉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


지훈은 말없이 팔을 벌렸다.


“안아요.”

“뭐?”

“안으라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뿐이라서.


“그러고 싶잖아.”


그리고 다음 순간, 허리로 돌아온 팔이 묵직하게 지훈의 몸을 끌어안아 당겼다.


온 몸에 밀려드는 사람의 체온, 체중, 부피감. 그냥 다 잊어버리고 눈을 감고 싶었다. 등수니 뭐니, 데뷔니 뭐니, 그런 머리 아프고 가슴 아픈 것들 다 잊어버리고 그냥 이대로 파묻혀 있고 싶었다.


“와, 내 걱정 되드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울컥,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어도 될까. 당사자도 아닌 내가, 그래도 될까.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할까. 그게 나을까. 상상도 못했다. 이 곳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 날이 올 것이라고는.


“괜찮다. 내 이 정도로 안 죽는다. 모르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속이 상하고, 미안해서. 설마 나 때문일까. 내가 그때, 비켜달라는 둥 하는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해 버려서.


그게 있잖아요.

나는

나는-


“고마해라. 내 니 마음 다 안다.”


눈물을 훔쳐내는 손등에 감긴 붕대까지도 마음이 쓰인다. 도대체 왜, 하는 짓 하나하나 이렇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때문에 속상하지 말고, 내 때문에 울지도 마라.”


이마에 입을 맞추는 입술은 여전히 따뜻하다. 어제처럼. 아니, 그 이전처럼. 앞으로도 그렇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을 만큼.


“아프지 마라. 절대로.”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4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