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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8

8. 센치해

“괜찮아요.”


어딘가 잠긴 목소리로, 다니엘은 그렇게 대답했다.


지훈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제 하루 종일 거울로 훔쳐본 다니엘의 춤선은 둔했다. 연습인 것을 감안한다 쳐도 어째서인지 동작도 작고, 박자도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아주 살짝 변해 있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를 정도이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밤새도록 누군가의 약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게 아마 다니엘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민망하게 느껴져 이불을 둘러쓰고 잠을 청했었다. 그 앓는 목소리는, 분하지만 야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좀 더 깊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무조건 괜찮대. 나더러는 그러지 말라더니, 자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몸이 좀 무거운데... 한 시간 정도만 자고 나갈게요. 그러면 괜찮을 거 같은데.”


늘 듣던 부산 사투리가 아닌 표준말은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가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지훈아, 귀찮겠지만 한 시간만 있다가 좀 깨우러 와라.”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부를 때는, 저런 말투였다. 그 어떤 끈적거림도 없는, 무덤덤한 말투.






다니엘이 부탁한 대로, 지훈은 한 시간 후에 방으로 돌아왔다.


다니엘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슬쩍 몸을 내밀고, 지훈은 그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이마에 손등을 대 보았다. 열이 펄펄 난다고까지 할 것은 없었지만, 미열이 있었다.


깨울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아서, 지훈은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아픈 게 맘 쓰여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나보다 등수도 높잖아. 이럴 때 푹 재워야, 내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변명을 혼자 열심히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어데 가노, 안 깨우고.”


느리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내가 분명히 한 시간만 있다가 깨우라 했제.”


뒤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 앉았다. 말없이 쓸어내리는 얼굴빛이 조금은 핼쓱했다.


“뭐야. 안 잤어요?”

“깼다. 좀 전에.”

“깼으면 연습실이나 오지 왜 죽은 척 하고 있어요? 내가 곰이야?”

“일날라 했는데 깨우러 온 곰돌이가 귀엽어가 죽은 척 좀 해봤다. 불만이가.”


가라앉아 묘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야릇했다.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목 완전 갔네. 잠이나 더 자요.”

“됐다. 일나야지.”

“열도 있던데.”


말을 하려다 말고 지훈은 움찔 입을 다물었다. 속을 읽히는 기분은, 언제나 그리 좋지만은 않다.


“와. 걱정되드나.”

“아니 그럼 사람이 아프다는데 걱정 안 되나?”

“니는 내 걱정 같은 거는 안 할 줄 알았는데.”

“왜 사람을 이상한 사람 만들고 그래요. 나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놈 아니야.”

“진짜가.”


쳐다보는 눈이 웃었다.


“가끔은 좀 아파야 되겠네. 니가 내 걱정을 다 해주고.”

“뻘소리 그만 하고 잠이나 자요. 2등씩이나 하면서 그렇게 독할 건 뭐야. 지금 연습실에 형 나왔으면 하는 사람 한명도 없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그게.

그냥 아프면 좀 쉬라는 말 정도를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냥 잠이나 자라고. 왜, 뽀뽀라도 해주면 잘래요?”

“치아라.”


다니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옮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좋아하고 말고 간에, 아니고 말고 간에, 사람이 아프다는데.


“에이 인심 쓴다.”


지훈은 일어나 앉은 다니엘의 옆을 꾸역꾸역 파고 들어가 그 목을 끌어안았다. 다니엘은 전에 없이 몸을 틀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절로 가라. 옮는다.”

“줄 때 좀 받지?”

“말 안 듣나.”

“뽀뽀한다? 진짜 옮아버리게.”


그렇게까지 협박하듯 말하니까 마지못한 듯이 다니엘은 힘을 빼고 지훈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순간 체중이 실려서 어깨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가끔은 아플만 하네.”

“다음엔 안 안아줄 건데.”

“새끼 할튼 비싸게 구네.”

“몰랐나봐. 비싼 거.”


목덜미로 와 닿는 내쉬는 숨결에서 단내가 났다.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많이 아픈 건가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훈아.”


눈을 감은 채, 다니엘은 지훈을 불렀다.


“안 되는 거 아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말부터 꺼내놓고 시작하는 걸까. 순간 입맛이 씁쓸해졌다.


“이대로 그냥 한 숨 잤으믄 좋겠다.”

“자요.”


어쩐지 조금은 착해진 듯한 기분으로 지훈은 말했다.


늘 유쾌하고 밝아서 평생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을 줄 알았지. 근데 이 사람도 이럴 때가 있구나.


“내가 재워줄게. 오늘만.”

“됐다. 자기는 멀 자노. 일나야지.”


슬그머니 지훈의 어깨를 밀어내고 다니엘은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가 있어라. 세수나 좀 하고 가께.”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워, 몸이 잠깐 휘청거렸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불렀다.


“형. 그냥, 오늘 하루는 쉬면 안 돼요?”

“와. 신경 쓰이나?”

“나 다시 1등해야 돼.”


말해놓고,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냥, 형이 아픈 거 싫다는 그 별 거 아닌 말이 죽어도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하루 제껴주면 안돼요?”

“야, 내는 1등도 아인데.”

“그래도 형이 나보다 등수 높잖아.”

“그래서.”


다니엘은 기껏 빠져나간 침대로 되돌아와 지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상하리만큼 꽉 주먹 쥐어진 지훈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내만 비키주믄 다시 1등할 수 있겠나?”

“응.”


아닌데.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이런 게 아닌데.


“알았다.”


다니엘은 웃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지훈의 손을 들어 그 끝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니가 그래 해 달라믄 그래 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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