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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5

5. Touch

그날 하루는 종일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웅크린 손바닥으로 물을 떠다 나르는 것처럼 머리 속으로 흘러드는 모든 것들은 그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흘러넘쳐 빠져나갔다.


뭐하자는 거냐.

그렇게 몇 번이나, 입 속으로 되뇌었다.


아침의 그 키스로 넋을 놓은 것은 자기 혼자 뿐인 것 같았다. 이 ‘접촉사고’의 또 다른 당사자인 다니엘은, 별로 그 일로 영향을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웃고 떠들고 농담을 했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연습에 참여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하나도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만 않았더라도, 오늘 연습 마치고 나랑 얘기 좀 하자는 소리를 굳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인데.”


쳐다보는 눈은, 오늘 무슨 있이 있긴 했나 싶을 만큼 평온했다. 화가 났다. 나는 오늘 하루가 그렇게 길고 힘들었는데 정작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니.


“이거 뭔가 불공평해요.”

“뭐가?”

“왜 나만 힘들어야 되는데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게. 왜 이 사람이랑 눈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한지, 말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움츠려드는지.


정말 좋아하기라도 하자는 건지.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는, 하루 종일.”


울컥 감정이 북받쳐서 말문이 막혔다. 지훈은 입술을 물어 씹었다. 다음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래요?”

“지훈아.”

“씨발, 그렇게 부르지 마요.”


어이 박지후이 하고 다니엘이 부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시비를 걸려는 전조처럼 느껴져서. 그나마 같은 기획사에 경상도 출신 연습생이 있어서, 경상도 남자들은 흔히 저렇게 친한 사람을 부르기도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배로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훈아 하고 이름만 부르는 게 너무 싫었다.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걸 계속 듣고 있다가는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래서.


“나 좋아하지 마요.”


지훈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나 형 싫어요. 그니까, 나 좋아하지 말라고요.”


순간 다니엘의 표정이 변했다.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의 눈빛이 때로는 꽤 차갑다는 것. 가늘게 실눈을 뜨고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빠진 얼굴로 쳐다보는 다니엘의 얼굴은 자기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는 못하겠는데.”


그 말꼬리는 커브처럼 끝이 뚝 떨어졌다.


“내가 니 좋아하는 것도 니한테 허락 맡아야 되나.”


평소보다 한 뼘 정도는 톤이 내려간 말투였다. 언성을 높이거나 말투가 거칠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 화났구나 하는 걸 그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좋아할 거면 혼자 좋아하든지.”


그래도 이왕 꺼낸 말이니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쩌라고. 나보고, 뭘 어쩌라고요.”


차라리 끔찍하게 싫었으면. 지훈은 눈을 감고 그렇게 생각했다.


싫었으면. 그 감정이 명쾌하다면. 두 번 돌아볼 것도 없이 그냥 싫기만 했으면. 그랬으면 얼마나 쉽고 간단한 문제일까. 징그럽게 남자끼리 뭐하는 거냐고, 그런 말이라도 쉽게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서.


“내가 형더러.”


싫어요.


“언제.”


무서워요.


“나 좋아해 달라고 그런 적 있어요?”


그렇게 마음대로 다가오지 마요.

난 뭘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 건지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없지.”


숨이 막힐 듯한 침묵 후, 다니엘은 입꼬리를 슬쩍 들고 싸늘하게 웃었다.


“그기 그래 싫으믄, 니가 내를 잘 떼내봐라.”






지훈은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아 새벽 늦게까지 뒤척거렸다. 그렇지만 오늘은 빨리 자라고 구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살짝 몸을 일으켜 다니엘이 누운 쪽을 흘끔 한 번 바라보고, 지훈은 꼼지락거리고 돌아누워 핸드폰을 켜고 며칠 전 밤에 주고받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왜 못자고 뒤척거려.]

[너]

[그러지 말라고]

[내가]

[아까]

[그런 소리까지 다 했는데]


그러면 안 됐던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 내보고 니 좋아해 달라 한 적 있냐고?

나는?

나는 머, 니 좋아하고 싶어가 좋아하는 거 같나?


좋겠다. 내 안 좋아해서.


그 말을 하던 순간 눈빛이 흔들리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까짓 말 한 마디에 그런 얼굴을 할 거면서, 날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애초에 왜 한 건데. 나는, 나는 그냥.


아니, 그런 게 아닌데.


차라리 형이 싫었으면 좋겠어.

형을 안 좋아했으면 좋겠어.

친하지도 않고,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고

여기를 나가면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뭐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이미 너무 가까이 가 버린 것 같아서.


[형 자요?]


문장을 하나 쳐놓고, 지훈은 차마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렇게 면전에 대고 질색을 하며 쏘아붙여놓고,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결국 지훈은 기껏 쓴 문장을 백스페이스를 눌러 모두 지웠다.


웃어라. 니는 안있나, 확실히 웃는 기 이쁘다.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예쁘다는 말은 이젠 더 이상 기쁘지도 기분 좋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그 순간만큼은 좋았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런 말 같은 건 듣지 못하게 되는 걸까.


안 웃어. 안 웃을게.


지훈은 베개 위로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았다.


형한테 그런 말을 해놓고, 웃으면 안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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