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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3

3. Call Me, Baby

속이 뒤틀리는 통증에, 지훈은 잠에서 깼다.


깨는 것조차 귀찮아, 처음엔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한번 위장을 옥죈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결국 지훈은 비척비척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유야 뻔했다. 스트레스겠지. 가만히만 있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환경에 내던져진 걸로도 모자라서, 신경 거슬리는 인간까지 생겼으니. 이런 상황에 속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강철 멘탈 인증인지도 모르겠다.


이마 위로 식은 땀이 배어 올랐다. 속이 시시각각으로 뒤틀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지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나 다급해서 신발을 채 신지도 못하고, 그는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화장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저녁 무렵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속이 텅 비도록 먹을 걸 다 토해내고 나자 어느 정도 속은 편해졌지만, 대신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눈물이 나고 피가 몰린 얼굴에는 홍조가 오르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져 찬물을 틀고 세수를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찝찝한 입 속을 헹구는 중에, 등 뒤로 아까부터 인기척이 끼치고 있음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거울 너머로 벽에 기대 이 쪽을 보고 있던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이런 꼴일 때.


그런 생각부터 들어버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와, 탈이라도 났나.”


그 목소리는 또 며칠 내 신경을 거스르던 그 목소리와는 파장이 달랐다. 차갑지도 않고 능글거리지도 않은, 지금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런 종류의 목소리였다.


“뭐 어지간히 많이 묵는 것 같지도 않더만.”

“신경 꺼요.”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지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일 보러 왔음 일이나 봐요. 오지랖 쩔어, 진짜.”


필요 이상으로 뾰족한 반응이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이 등 뒤로 꽂혔다. 아니, 그 시선 자체보다도 그 시선을 의식하는 자신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그냥 속이 좀 안 좋은 거니까 오버 좀 하지 마요. 그리고 내가 뭘 많이 먹는지 아닌지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알지, 와 모르노. 내내 니 입만 쳐다보고 있는데.”


뜨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니엘은 지훈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지훈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훔쳤다. 뜨끔 놀라 굳어진 뺨이 머쓱했다.


“사람 속 좀 디비지 마라.”


뭐라는 거야.

누가 누구 속을 뒤집는다고.


“니가 이러니까, 내가 니보고 얼라다 하는 기다. 새끼야.”


또 그놈의 애타령.

내가 뭐가 그렇게 앤데.

형은 나보다 뭐가 그렇게 어른인데.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서, 지훈은 있는 힘껏 다니엘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어린애 같다는 건데요.”


지훈은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대꾸했다.


“저번에 그랬죠. 나보고 형 좋아하기라도 하냐고. 그러는 형은, 나 좋아하기라도 해요?”


순간, 바라보는 표정에 금이 갔다.


허를 찔린 것 같기도 하고 동요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얼굴. 언제나 매사에 유쾌한 그에게서 흔히 나오는 표정은 아니었다. 뭔가 말실수 같은 거라도 한 걸까. 지훈은 어쩐지 뜨끔한 기분으로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아.”


어이, 박지후이-

다니엘은 늘 지훈을 그렇게 불렀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조금은 건들거리는 듯한 뉘앙스로. 늘 그렇게 부르는 게 일상이어서,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건 거의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래. 내 니 좀 좋다.”


머뭇거리지도 않고, 다니엘은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내한테 그 말 들어내서, 은자 속 좀 후련하나?”


아니, 틀렸다. 속이 후련한 게 아니라, 더 복잡해졌다. 이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대놓고 물으면, 응당 한 발쯤은 물러날 줄 알았다. 아니, 뭐 꼭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우물거리는 대답을 하며 우물쭈물 뒷걸음이라도 칠 줄 알았다. 이렇게 정공법으로, 대뜸 인정해 버릴 줄은 몰랐다.


“형 좀 웃긴다. 알아요?”


지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이 아니라면, 그 말조차도 하지 못할 뻔 했다.


“어린애나 따먹는 변태 아니라며. 근데, 변태 맞잖아. 그런 거면.”

“그래서.”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얼라나 따묵는 변태 안 될라고 어금니 꽉 깨물고 참고 있는 거, 안 보이나?”


다니엘은 손을 뻗었다. 움찔 놀라 온 몸이 굳어졌으나, 그 손은 조용히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 몇 가닥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겨 젖혀줄 뿐이었다.


“니보고 책임지라 안한다.”

“뭘요.”

“내가 니 좋은 거.”


저런 엄청난 말을, 참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하는 다니엘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해서 보는 자신조차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니보고 맞장구 치달라고도 안할 거고, 니보고 내 좋아해 달라고도 안한다.”

“왜요?”

“말했제. 어금니 꽉 깨물고 참고 있다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 참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어째서, 왜.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다니엘의 말은 이런 상황에서마저 그 말을 믿게 하는 힘이 있었다.


“대신에, 쓸데없는 일로 골질하지 마라. 이쁜 얼굴 뭉개지도 말고. 니나 내나, 여 놀러 온 거 아이다 아이가. 안 그라면.”

“안 그러면, 뭐.”


지훈은 씨근덕대며 대꾸했다.


“따먹기라도 할 거예요? 어린애를?”

“모르지.”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지훈의 말은 참 간단하게도 먹히고 말았다.


“눈깔 디비지믄 그럴지도.”






다니엘이 먼저 돌아가고 난 후 한참이나 더 머뭇거리다가, 지훈은 방으로 들어왔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신경이 쓰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지훈에게는 이미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훈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잠든 방안은 조용했다. 발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자리에 누웠다. 예상은 한 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한 바탕 토해버리고 나니 속이 가라앉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그것보다 하나도 가볍지 않은 답답한 감정이 어린 심장을 잔뜩 내리눌렀다. 옆으로 누워도, 돌아누워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안 자나.”


착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를 흔들며, 다니엘의 목소리가 지훈의 귓전을 때렸다. 지훈은 기겁을 해 몸을 움츠렸다.


[뭐하는 거예요]


허둥지둥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 누구는, 답답한 거 입 밖으로 낼 줄 몰라서 이렇게 혼자 끙끙대는 줄 아나.


[왜 못자고 뒤척거려.]


답은 빨리도 왔다.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똑바른 표준말로 적힌 메시지를 보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너]

[그러지 말라고]

[내가]

[아까]

[그런 소리까지 다 했는데]


오타 하나 없는 말끔한 표준말로 날아오는 메시지는 색다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걸면, 또 끝이 뚝 떨어지는 부산 사투리로 대답할 거면서.


[빨리 자라. 시간이 몇 신데.]

[잠이 안 와요.]

[빨리 자랬다.]

[안 자면 뭐 어쩔 건데.]


저 쪽, 다니엘이 있는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박지후이, 안 자고 부스럭거리믄 으스러지게 껴안아뿐다. 빨리 자라.”


미쳤나봐.

지훈은 기겁을 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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