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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Time Light 1

1. Why So Serious?

“안 져.”


남이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약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이다.


예쁘장하다, 곱상하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지금껏 질리도록 듣고 자랐다. 으쓱한 때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지훈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발목 한 쪽을 잡아 가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을 해도 멋있지 않다.

무엇을 해도 남자답지 않다.

무엇을 해도 그저 예쁠 뿐이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또 한 명의 사람이 그의 앞에 버티고 섰다.


“다른 사람한테 다 져도 형한테는 안 질 거예요.”

“진짜가? 함 보까?”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 그 어디에도, 심각함이나 진지함 같은 건 없다. 아마, 방금 한 그 말도, 별다른 악의 없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지금껏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다음 순간, 다니엘은 지훈의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라고 하던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유지해야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곧잘 그런 것을 무시하고, 지금처럼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댄 후 뚫어져라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어지간히나 재미있는 것처럼.


“니 다음 순위 때 내보다 밑이믄, 니 내한테 뭐해줄 건데?”


지훈이 파악하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재미없는 농담에도 크게 웃고,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리 잘 안하고, 매사 가볍고 심각하지 않은 그런 사람. 지금 이것도 그런 농담의 한 종류가 아닐까.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받고 싶은데요?”


그러나 다니엘의 입에서는 조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니.”


다니엘은 긴 식지손가락 끝으로 지훈의 어깨를 가볍게 쿡 찔렀다.


“다음 순위 때 니가 내 밑이믄,”


그러나 가끔,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건가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분명히 웃으면서 말하는데 그 눈빛은 묘하게 차가웠다. 웃고는 있지만 진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함 자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잔다, 그러니까, 뭐, 섹스라도 하자는 말인가.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이며, 왜 이 사람은 이 말을 내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수를 셀 수도 없는 온갖 상념들이 튀어나와 어린 머리를 어지럽혀, 지훈은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고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다, 그러니까, 뭐, 섹스라도 하자는 말인가.


“야, 씨발. 농담이다 새끼야.”


다니엘은 웃었다.


“어지간히 놀랬는갑네. 땀나는 거 봐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니엘은 손을 내밀의 지훈의 이마에 배어 오른 식은땀을 훔쳤다. 내가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농담을 한 거냐는 듯한 그 표정에 울컥 자존심이 상한 것은, 어쩌면 그 순간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죠 뭐.”

“뭐?”

“잔다고. 형이랑. 내가 순위 밑이면.”


오기를 부릴 문제가 아니었다-는 자각이 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지금 다음 순위에 소년의 동정을 걸어버린 셈이었다. 물론,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니 지금 니가 뭐라 했는지 알고는 있나?”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묘해서, 내가 뭔가 대단한 실수를 해버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할 수 없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랬으니까.


“알지. 그럼 모를까봐.”

“머스마 새끼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 아이다. 한 번은 못들은 걸로 해주께.”

“아 씨발, 사람 데리고 장난해요? 잔다니까?”


쓸데없는 자존심, 혹은 오기라는 것은 세상을 편하게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기엔, 지훈은 아직 어렸다. 그것으로 핑계가 될 수 있을까.


피식 웃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지훈은 뭔가 가슴 속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험의 답지를 한 칸씩 밀려쓴 것을 집에 와서야 깨달은, 뭐 그 비슷한 기분이었다.


“박지후이, 그래 안 봤는데 남자네.”


그 기묘한 내기는, 그렇게 성립되었다.


“그래. 함 해보자. 안 봐준다.”






머피의 법칙이란 흔히들 아는 대로 나쁜 일이 연거푸 일어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잘못될 수 있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의미라고 했다. 그런 거라면, 다니엘과 한 그 내기 또한 일종의 머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습게도 다니엘과의 내기였다. 아, 정말 자야 되나. 그 일이 있고 난 후 누가 밀어주기라도 하는 듯 오르기 시작한 다니엘의 투표수 추이 그래프를 보고 있자니 저 하늘 위에 계신 어떤 매우 짓궂은 분의 탓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거기서 왜 그런 쓸데없는 오기를 부린 것인가 이불이라도 차고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이젠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지훈은 결투라도 신청하는 기분으로 다니엘에게 밤 늦은 시간 면담을 신청했다.


“와? 할 말이 뭔데?”


부스스한 머리에 졸다 깬 듯한 시큰둥한 얼굴을 보니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 내기의 내용에 그렇게나 깊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 것도 같아서. 그러나 그랬거나 말았거나, 말을 꺼내려는 이 쪽의 심사가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 저기요, 그게.”


몇 번을 더듬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나오지 않아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물어 씹었다. 다니엘은 그런 지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몇 번 하품을 했다.


“할 말 없으믄 드가 잠이나 자라. 내도 잘란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다니엘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떡하면 돼요?”

“뭐를?”

“자기로... 했잖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뗐다. 다니엘은 그 자리에 딱 발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와? 진짜 잘라고? 내랑?”

“약속했으니까.”

“하, 새끼.”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못 받은 빚을 받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는 지훈의 뺨을 꼬집어 몇 번 흔들었다. 어린 동생이나 조카라도 귀여워하듯이.


“됐다. 치아라.”


그 말은,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모욕적이기도 했다.


“그치만...!”

“박지후이 까불지 마라.”


웃고는 있지만, 눈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꼬집은 뺨을 툭툭 때리는 손은 영락없이 애 취급을 하고 있는데, 쳐다보는 눈은 또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혼난다.”


지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장난이었다.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화가 나기도 했다. 고작 이따위로 끝을 낼 그런 장난스러운 말을 굳이 내게 던진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사람 가지고 놀면, 재밌나요.


“형이 그랬잖아요.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라고.”

“그래서.”


다니엘은 웃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 눈빛이 차가웠다. 그래서, 네가 지금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묻기라도 하듯이.


“나한테는 그래놓고, 왜 한 입으로 두말해요?”

“뭐?”

“약속을 했으면, 지키라고.”


쳐다보는 얼굴이 굳어졌다. 단지 웃음이 사라진 것 뿐인데, 다니엘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뭔데.”


되묻는 목소리는 그지없이 차가웠다.


“니 내 좋아라도 하나?”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뜸 그렇게 물어오니,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내하고 자고 싶으믄 내 좋아해봐라. 그라믄 함 생각해 보께.”

“그런 게 어딨어요. 난 그냥 약속한 거니까.”

“접수 안한다, 그딴 거.”


다니엘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니 눈에는 내가 먼지 모르겠는데, 내 얼라 따묵는 변태 아이다. 헛소리 집어치고 드가 잠이나 처자라.”


미련없이 돌아서는 그 뒤에 대고,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그게 문제예요? 내가 스무 살 안 넘어서, 그게 문제냐고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니엘은 돌아선 채로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별 것 아닌 움직임이 정말로 지훈을 화나게 했다.


“그러는 형은, 뭐 그렇게 퍽이나 어른이야?”

“어.”


다니엘의 대답은 낮고 단호했다.


“내는 최소한 스무 살은 넘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대단한 거 맞다. 니는 죽었다 깨나도 어른 아이다 아이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했을까. 다니엘은 다시 지훈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그는 그 자리에 굳어진 지훈의 어깨를 몇 번이고 툭툭 두드렸다.


“내가 얼라 데꼬 농담이 심했다. 미안하다. 사과하께. 고마해라.”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 말 맞다.”


다니엘은 담담한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평소 때의 그 잘 웃고 장난 잘 치던 눈과는 다른 눈이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눈은 어른의 눈이었다.


“잘 들어라. 내는, 내 좋아하지도 않는 얼라하고 잘 마음 없다. 장난으로라도 그 말 꺼낸 거는 내가 실수한 거 맞다. 그러니까, 니도 고만해라.”

“형.”

“고만해라 했다.”


스읍-하는 소리. 다니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언짢아져 있었다.


“진짜 확 잡아묵기 전에.”




+. 썰은 속도는 빠르지만 아무래도 연성러 입장에서 불연소감이 남게 마련이죠. 그래서 연성체 변환을 시도해 봅니다. 큰 내용은 바뀌는 거 없겠지만 소소한 변화는 있을 수 있고, 다니엘의 대사 중 표기가 지나치게 어색한 건 좀 순화(?)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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