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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윙] 부탁해Save Me






Trigger warning:가정폭력 및 따돌림 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BGM:우주소녀 '부탁해'





요컨대, 미션스쿨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다. 바깥에서야 뭐라든, 성소수자의 인권이 어떻게 얼마나 격상되든, 낮은 담을 친 이 학교 안에서는 아직도 부부관계 이외의 성관계, 특히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동성 간의 성관계는 신의 노여움을 사는 짓, 벼락을 맞아 죽을 짓,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 하는 말을 참 거리낌 없이도 내뱉는 많은 선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 안의 그 누구도 그 말에 입을 열어 토를 다는 녀석은 없었다. 두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여타 등등의 많은 이유들로.

아마도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입에 머금은 말을 채 다 꺼내보기도 전에, 그렇게나 야무지게 까여버린 건.

딴 생각을 하다가 하차벨을 누르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버스가 막 정류장을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뒤늦게야 벨을 누르고, 아저씨 차 세워 달라고 숫제 고함을 치듯 말했다. 정류장에서 몇 발 벗어난 곳에 큰 생색이라도 내듯 차를 멈추고, 버스 기사는 왜 하차벨을 안 누르느냐고 시비라도 걸 듯 우진을 몰아세웠다. 아, 예, 예. 잘못했슴다. 건들거리는 기색으로 몇 번이나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겨우 우진은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뒷문을 닫은 버스가 꾸물꾸물 정류장을 벗어나 도로 안으로 접어들자 그 뒷꽁무니를 향해 힘차게 중지 손가락 하나를 처들었다. 내가 집이랑 학교에서 꼰대질 당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버스 기사한테까지 꼰대질을 당해야 되냐. 핸드폰 배터리는 고작 15% 남아 있었다. 오늘 뭐한다고 폰을 이렇게 많이 썼지. 덕분에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린 채로 우진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더러워.

그 말이, 기껏 꺼낸 고백에 대한 답이라는 걸 알아듣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도 결국은, 그 새끼들이랑 똑같구나.

곱살스런 눈매를 찌푸리고 그렇게 대답한 지훈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우진의 교실에서 가까운 화장실은 두 군데가 있었다. 그 중 뒷문 쪽에서 가까운 화장실은, 걸핏하면 청소 중이라는 팻말이 나붙은 채 안으로 잠겨 있곤 했다. 뭐 얼마나 청소를 열심히 하길래 날마다 청소 중인가 정도의 소감밖에는 없었다. 어느 날 그 안에서 하지 말라는 비명 소리와 우는 소리, 낄낄거리고 웃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우연히 듣지만 않았더라면. 잠겨 있지 않은 문을 발로 까고 들어간 그 화장실에서 목격한 것은 구석에 몰아붙여진 채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홈빡 젖은 채로 바지가 반쯤 내려가 있는 한 녀석과 그 녀석을 빙 둘러싼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 물에 젖은 녀석을 둘둘 싸매 질질 끌 듯 데리고 나온 그 순간, 이미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미리 예감했어야 했던 걸까.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노라니 괜히 무럭무럭 짜증이 치밀어, 우진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어디라 할 거 없이 으아아아악 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쪽팔렸다. 쪽이 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임이 재미없는 날이 다 있다니, 이것 참, 요즘 내게 큰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이라고, 집 앞 피씨방에서 맞지 않는 총을 한참이나 쏘고 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우진은 생각했다.

어느새 시간은 많이 늦어져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집에 가서 씻고 밥을 먹고 조금 꾸물거리다보면 밤이 될 것이고, 자고 일어나면 또 학교에 가야 될 것이고, 학교에 가면 또 그 새끼 얼굴을 봐야 될 것이고.

우진의 생각은 여기서 딱 멎었다.

좋은 대답이 나올 걸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 좋아하는 거 같다는 말에, 냉큼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더럽다’는 말씩이나 들을 줄은 몰랐대서, 두 번 세 번 되씹어도 어린 마음은 여전히 언짢았다. 그리고 사실, 단칼에 어렵게 꺼낸 고백을 거절당한 그 마음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훈이 싫지 않아서, 실은 그 점이 더욱 우진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

그 때 누군가가, 땅을 쳐다보고 돌부리를 툭툭 차며 걷는 우진을 불렀다.

검정 볼캡을 눌러쓰고 색이 짙은 청바지에 흰 셔츠 차림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 볼캡이 얼굴을 숨기려는 생각이었다면 별 소용은 없어 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흰 셔츠는, 대충 보기에도 불길한 얼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색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그러나 이제는 제법 얼룩덜룩하게 말라붙은 암갈색의 뭔가를 문질러 닦은 흔적들. 그런 것을 입고, 그는 마치 숨어 있기라도 하듯, 우진이 사는 아파트 근처의 장미덩굴이 우거진 돌담 그늘 아래 숨었다가, 가까스로 우진을 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은 두 번째로 놀랐다.

그렇게 튀어나온 그는, 지훈을 너무나 닮아 있었다. 아니, 그냥 지훈이라고 믿어버려도 좋지 않을까. 부르는 그 목소리가, 쳐다보는 눈이 완연히 지훈이었다. 오늘 학교에서 본 것보다 조금 긴 머리와, 젖살이 빠져 조금은 갸름해진 얼굴과, 이미 알던 것보다 조금은 틀이 잡힌 몸의 태와 키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두 번 볼 필요도 없이. 요컨대, 지훈에게 형이 있다면 꼭 이렇게 생긴 사람이 아닐까 하고.

그 숨 막히는 낯익음에, 우진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기.”
“누구신데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우진은 새삼 뜨끔 놀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봐도 그는 지훈과 닮아 있었다. 벌써 며칠째, 운동화 바닥에 끼어버린 자잘한 돌멩이 부스러기처럼 사람의 마음에 걸려 있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면 그런 걸 ‘게이’라고 하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한 자문자답 끝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아 씨발!을 외치게 만들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혼자 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기껏 어렵게 꺼낸 말을 단 한 마디로 무참하게 박살내 버린 그 박지훈. 그 행색은 아주 똑같은 것도 아니면서도 또 아주 다르지도 않아 새삼 우진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길게 자란 머리칼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키도 원래보다 조금은 자란 것 같긴 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저거는 얼굴에 눈깔 밖에 없나, 하고 중얼거리게 했던 그 눈이. 뽀얀 얼굴이. 아니, 그 무엇보다도 그를 바라보는 우진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신데, 저를.”
“….”

애써 사람을 불러놓고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건지도. 남자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길,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도 넉넉히 알아볼 만큼 커다랗고 예쁜 눈이 일렁거리고 있어, 하마터면 울지 말라는 돼먹지 않은 말을 할 뻔 했다.

“저기, 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그 때, 골목 저 편에서 경찰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남자는 흠칫 놀라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제가 본래 숨어 있던 장미덩굴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저라서 당황스러워, 우진은 한 걸음을 떼어 지나가는 경찰차의 시야에서 남자를 가렸다. 정확히는, 그가 입고 있는 알 수 없는 얼룩이 진 셔츠를. 길가에 서 있는 고딩 나부랭이 따위는 내 관심 밖이라는 듯 경찰차가 유유히 지나가고 나서야, 우진은 슬그머니 남자의 앞을 비켜섰다.

“일단 입어요.”

이래서 될 일이 아니다 싶어 재킷을 벗어 건넸다. 빨리 끝나지도 않을 용건 같은데, 또 이런 식으로 숨바꼭질하는 건 사양이었다.

“누가 보면 피인 줄 알겠다.”

언젠가 밀가루로 모자라 깨진 계란까지 덮어써 그대로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행색으로 넋 잃은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지훈을 불러세우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둘러준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새끼가 뭐랬더라. 남의 일에 간섭 말랬나. 이번에도 그러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우진이 벗어준 재킷의 앞섶을 꼭 오므려 셔츠에 묻은 얼룩을 가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캔커피 두 개를 샀다. 두 개를 사려던 건 아니고, 제일 싼 것을 샀는데 그게 하필이면 원 플러스 원이었던 거라고 우진은 스스로를 향해 변명했다. 안으로는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고 편의점 밖을 서성거리던 남자에게 커피 하나를 던져 주고, 우진은 남자를 앞장서 아파트 놀이터로 갔다.

착한 어린이들은 이제 다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아무 인적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우진은 흘끗 눈을 돌려 자신의 교복을 걸친 남자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손등을 덮은 소매 끝으로 비어져 나온 손 끝이 붉었다.

“뭐.”

언제까지 이렇게 앉아만 있을 건지, 우진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내한테 할 말 있어요?”

남자는 찔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우진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마시다 만 캔 커피만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우진은 입을 다물고 그가 무슨 말이라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사실 우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기도 했지만.

“너.”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지훈이 알지.”
“….”
“니네 반. 박지훈.”
“아는데요.”

대답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졌다.

“걔가.”
“….”
“어. 그러니까. 며칠 전에.”
“….”
“너한테.”
“더럽다고 한 거요.”

남자는 움찔했다. 담배 생각이 났다. 하필이면 이럴 때 꿍쳐놓은 담배가 한 가치도 없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만.

“그래. 그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훈이가 정말로 널 싫어해서가 아니고.”
“저기요.”

형 같은 걸까.

곁에 앉은 남자가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사이, 우진은 나름대로 열심히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궁리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는 설명은 그거였다. 지훈의 형. 아주 많이 닮은. 형제끼리는 더러, 목소리만 들어서는 누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헷갈리기도 하니까.

“그 얘기를 왜 그 쪽이.”
“얘는 그러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훈이 아빠 없는 건 아니?”
“금마하고 그런 이야기씩이나 하는 사이 아닌데요.”
“아빠는 원래 없고 엄마하고 살았어. 아빠는 죽었는지 이혼했는지 그건 몰라. 물어본 적도 없다고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새 아빠가 생겨서, 그냥 잘됐다고만 생각했대.”

그러나 남자는 우진의 말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진은 커피를 마시려던 것도 잊고 입을 다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인지 원래라면 절대로 알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 날 선 예감이 뒤통수를 찔러왔다.

“이 녀석이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초등학교 5학년인지 6학년인지 정도였다던가. 엄마가 바빠서 집에 늦게 오는 날이면 아빠가 자꾸만 이상한 걸 시키더라는, 뭐 그런 거. 그런데 그러고 나면 꼭 친구들하고 맛있는 걸 사먹으라고 돈을 주더래. 엄마한테는 비밀이라는 말도 같이.”

꿀꺽, 하고 남자의 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곁에서도 보였다. 남자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알아듣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그러니까. 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이, 제가 알아들은 그대로의 뜻이 아니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그나마 다행이지. 친 아빠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그게 어떤 건지 알게 된 건, 녀석이 중학교 들어가고 난 후였대. 자기가 그간 받았던 용돈이 어떤 의미였나 하는 것도.”
“….”
“자기가 그간, 몸을 팔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나 역시, 그게 그 뜻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날.”

그는 언성을 높였다.

“처음으로, 손목을 그었다던가. 죽으려고.”

손목보호대. 우진은 지훈이 늘 왼 손목에 손목보호대를 하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딱히 운동 같은 걸 하는 것 같지도 않은 녀석이 왜 맨날 손목보호대를 차고 다니는가 하는 것을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났다. 학년 초였나, 어떤 선생이 시비라도 걸려는 조로 그거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손목이 안 좋아서요. 터널 증후군인데요. 하나도 웃긴 것 같지 않은 그 말에 교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지던 것도.

“고등학교 때였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 주제에. 근데 그게 남자였어. 이 새끼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그냥, 남자한테 길든 몸이 끌릴 뿐인 건지. 그걸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어서, 두 번째로 손목을 그었어.”

어째서일까. 그네의 사슬을 얽어쥔 남자의 손목으로 시선이 갔다. 그 손목에도 손목보호대가 있었다.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긴 했지만. 그리고 그 손목보호대에도, 그의 옷을 더럽힌 것과 비슷한 종류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저기, 도대체 누구세요.”

우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 얘길 왜 그 쪽이.”
“우진아.”
“기분 디게 나쁜데요.”

우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훈이는, 그 쪽이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나 하고 다니는 거 알아요?”
“….”

우진은 흔들거리는 그네에서 일어섰다. 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져버릴 것 같았다.

“오늘 이야기 못들은 거로 할게요.”
“우진아, 나.”

한 타이밍 늦었다. 자리를 피하려면 그 눈에 맺힌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전이었어야 했다. 이미 봐버린 이상은, 곤란했다.

“사람을 죽였어.”
“….”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한참이나 지나서 너를 다시 만났어. 클럽 화장실에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마시고 짐승처럼 토하고 있는데, 네가 등을 두들겨 줬어. 너는 나이도 안 먹냐 얼굴 하나도 안 변했네 그러면서 웃었어.”

너는 나이도 안 먹냐? 얼굴 하나도 안 변했네.
니는 나이도 안 먹나. 얼굴 한 개도 안 변했네.

한 적이 있었을 리 없는 그 말은, 마치 이미 수천 번이나 해본 말인 듯 입술에 달라붙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너만 좋아했다고 하면, 나 좀 덜 더러워지는 거냐고. 미친 새끼.”
“….”
“빨리 좀 오지 그랬어.”

남자는, 아니, 아마도 지훈이라고 불러야 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1년만 빨리 왔으면 너한테 갈 수 있었는데.”
“….”
“어떻게 알았는지, 너를 다 알고 있었어. 나한테 그러더라. 그 놈은 네가 어떤 새끼인지 아냐고. 네가 뒷구멍으로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 알면 널 사람 취급이라도 할 거 같냐고. 내 몸에 올라타 내 목을 조르면서 웃었어. 네가 날 놔두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냐고.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내가.”

지훈은 손에 쥐고 있던 캔 커피를 떨어뜨렸다. 그 손이 흐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망쳤어. 너무 무서워서. 너무 억울해서. 내가 그 동안 맞은 건, 당한 건 다 없던 일이 돼버리고, 내가 그 새끼 죽인 것만 남은 게 너무 억울해서. 근데 아무 생각이 안 났어. 너한테 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너까지.”

천천히 고개를 젓자 늘어진 머리칼이 따라 흔들렸다.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
“울면서 생각했어. 차라리 그때. 고등학교 때. 그 때 네가 하는 고백을 받아줬더라면 이렇게는 안 되지 않았을까. 받아줄 걸. 그 때도 네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닌데. 나는. 그러니까. 나는.”
“….”
“그렇게 몇 천 번쯤 간절하게 되뇌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까 여기였어.”

그 말끝은 흐릿하게 스러졌다. 지훈은 얼굴을 감싸고 둥글게 등을 말았다. 그 몸집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작았다.

“부탁해. 열일곱의 박우진에게, 스물일곱의 박지훈이.”

지훈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날 붙잡아 줘. 내가 망가지지 않게. 내가… 이런 꼴이 되지 않게.”
“….”
“밀어내는 거밖에 할 줄 모르는 나를… 네가 붙잡아줘.”

스물일곱.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훗날의 이야기.

오늘 들은 너의 그 말이, 너의 그 말로 인한 나의 상심이, 얼마만큼 큰 나비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우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보았다. 걸쳐준 교복을 걸친 어깨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그 눈을.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기다리라.”

10년의 시간.
그 긴 시간동안, 도대체 뭘 어떡하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데리러 갈게.”










언제나처럼, 지훈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자고 있었다.

여기는 이를테면 지훈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몇 년 전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한 학생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덕분에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 학교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 지훈은 늘 이 곳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자고 있다. 지훈은 우진이 이 장소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쩌면, 너의 그 ‘말’ 이전에, 너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내게 모종의 대답을 한 건지도 모른다.

“야.”

대답이 없다. 들리지 않는지, 안 들리는 척 하는 건지. 손을 뻗어 이어폰 한 쪽을 잡아당겼다. 뽑혀 나온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뭐하는데.”

흘끗, 눈을 한 번 들어 바라보다가 다시 귀찮다는 듯 눈을 감는다. 왼손목에 끼워진 손목보호대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저 속에 숨겨져 있을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처들.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서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왜.”

대답은 퉁명스럽고, 까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젠 속지 않을 거라고 우진은 다짐했다. 이 싸움은, 이미 내게도 물러설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었으므로.

“마이 내놔라.”
“뭐?”
“내 마이 내노라고.”
“뭐래. 네 교복을 왜 나한테 와서 찾아. 맡겨놨냐?”
“어.”

그러니까, 10년 후 그 때까지도 난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렇게 살아온 너를 흔들 만큼.

그거면 충분했다.

“니한테 맡겨놨는데. 내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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