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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22











거의 싸움을 거는 것에 가까운 그런 말을 듣고도, 규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독 검은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지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의 부자연스러울 만큼 흰 얼굴은 자유롭지 못한 몸 때문에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부담스러울 만큼 검었다.


“재미있군요.”


한참만에야 입을 여는 규원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낮고 짙게 울렸다.


“기자님의 말씀대로라면, 예전 그 분의 실종 또한 제가 저지른 짓이라는 말이 되겠고.”
“….”
“기자님의 연인을 제가 납치해서 이 곳으로 끌고 온 후에, 모종의 조작을 통해 기억을 망가뜨리고 제 곁에 두고 부리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물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조금 전에 한 말은 3년에 걸친 의건의 실종을 전부 규원에게 뒤집어씌우는 듯한 말이었다.


“혼자서는 집 밖 출입도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전지전능하게 봐주시다니, 이것 참.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다면 그런 쓸데없는 짓 대신에 제 다리나 고쳤을 테지만.”


규원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훈은 가만히 뺨 안 쪽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적어도 그 말만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훈은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조금 전 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제 감에만 의존한 것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걸 말이죠.”


사실 이 이야기는, 다니엘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미 시작할 가치조차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얼굴이 닮았다고, 체격이 비슷하다고, 심지어 비슷한 위치에 점이 있다고 그 사실이 다니엘이 의건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지어 심장에 심장이 겹쳐지던 어젯밤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던 다니엘을 두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큰 모험일지도 몰랐다.


“지문대조라도 해보지 않는 이상, 강 비서님이 정말로 제가 사랑했던 그 사람인지 아닌지조차도 확인은 되지 않겠죠.”


그러나, 그렇더라도.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의건’이 아닌 ‘다니엘’을 생각했다. 명함을 찾느라 온 코드의 주머니를 한 번씩 뒤적거리던 부산한 손, 자신의 가방을 빼앗아들던 손길, 그라인더에 커피를 갈던 모습, 규원의 날카로운 말에 붉어지던 뺨, 동그란 안경이 걸린 콧잔등, 별 것도 아닌 말에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던 모습 같은 것들. 울지 말라고, 가슴이 아프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와, 몸을 끌어안던 늘씬한 팔과, 어깨에 대어 오던 열이 오른 이마 같은 것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예전에 지훈이 알던 의건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훈에게 이 당돌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만든 것은 3년 전의 죽은 추억이 아니라, 요 사흘 간 지훈이 보고 듣고 느낀 살아있는 다니엘의 모습들이었다.

그러니까,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러나.”


그래서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 사실은, 이미 자신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강의건인지, 강다니엘인지 하는 것 따위는.


“저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말씀은.”


규원은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 비서가, 설령 기자님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저에게서 구해내시겠다는 말입니까?”
“네.”


그 대답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단호했다.


“귀한 인터뷰를 허락해 주신 분에게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씀을 드리는 데는 그 정도의 각오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순간 서재 안의 모든 소리가 죽었다. 벽에 걸린 벽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만이 그 침묵을 일정한 간격으로 쪼개며 흘러갔다. 지훈도 규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침묵 속에서, 지훈은 규원에게도 자신의 의혹을 일소에 부칠 그 어떤 확증도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좋군요.”


한참 후에야 규원은 활짝 웃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과대평가해 주시다니. 마치 ‘쏘우’의 직쏘라도 된 기분인데요.”


규원은 엷게 웃었다.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딘가,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조금씩 아까와는 달라지고 있는 것을 지훈은 느꼈다. 좋은 방향인지 아닌지는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분이 실종된 지 3년이 지났다고 하셨죠.”


규원은 다시 물었다.


“그 3년의 시간은, 그 분을 잊기에 부족했습니까?”
“무슨 뜻이죠?”
“이런 식의 무리수를 두지 않고는 도저히 정리되지 않을 만큼, 기자님의 그 3년이 불행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불행했느냐고요.”


순간 울컥,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까 그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선생님의 다리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으셨다고요.”
“그랬죠.”
“저에게도 비슷했다고 하면, 건방진 말씀이 될까요.”


‘왜’라는 것은, 의외로 사람에게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납득하고 싶어 한다. 이해하고 싶어 한다. 정작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대해서는 체념하고 받아들일지라도,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수긍도 이해도 하지 못하는 데서 세상의 숱한 불행이 일어난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어쩌면 지극히 무용한 그 실마리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것은 느닷없는 불행을 겪은 거의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다. 지훈 역시도 그랬다.


“3년의 시간이 부족하셨냐고 하셨는데, 저는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이 저를 두고 사라졌는지, 저에게 왜 아무런 말도 미리 해주지 않은 것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요.”


지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안 해 본 생각이 없습니다. 그 날 내가 시킨 것이 늘 마시던 카페라떼가 아니라 다른 것이어서였을까. 그날 내가 입고 나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라면을 끓일 때, 저는 계란을 풀어서 붓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 사람은 다 익어갈 무렵 그냥 툭툭 깨서 넣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만나는 내내 그 문제를 혼자 꾹꾹 참고 있다가 그 날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데도 이유가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필요했다. 자신의 지난 3년은 끊임없이 그 이유를 찾아가던 순간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지훈은 지금 이 순간에야 깨달았다.


“이런 웃기는 생각을 3년 내내 했습니다.”
“….”
“그래서, 이젠 알아야겠습니다. 왜 우리가 헤어졌는지, 그 이유를.”


어쩌면 자신은 지난 3년 간, 의건이 아니라 의건이 사라진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 보죠. 그 전에.”


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당사자를 빼놓고 이런 이야기를 진행하는 건 곤란하겠죠. 강 비서를 좀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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