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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20











언제나처럼 규원의 서재에서, 규원과 지훈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다니엘이 내린 커피를 서버 채로 들고 들어와 잔에 따랐다. 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에서 뭔가를 느낀 것인지, 다니엘은 벌겋게 얼굴을 붉힌 채로 커피를 다 따른 후 도망치듯 서재에서 나갔다.

그렇게 다니엘이 사라진 후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뜨거운 커피를 몇 모금이나 후후 불어 마시는 동안, 규원도 지훈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 견고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어쨌든 지훈이었다.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지훈은 들었던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선생님이야 화단의 스타시지만, 저는 그냥 일개 월급쟁이 기자일 뿐인데요. 그런 저에게 궁금하실 일이 뭐가 있으실까요.”
“인터뷰라고 말은 했지만, 별 건 아닙니다.”


규원은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저라는 사람은, 눈치 채셨겠지만 굉장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는 제 몸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지훈은 입을 다문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직은, 그의 말에 어떤 대답을 내놓는 것이 적당한지를 미처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냥 만 이틀 동안 제 이야기를 털어놨으니 기자님 이야기도 좀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 제 다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가, 하는 걸 제 입으로 남에게 털어놓은 게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시피 해서 말이지요.”


지훈은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가 함부로 남에게 털어놓을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는 지훈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불특정 다수가 접하는 언론에 대놓고 공개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산속에 이렇게 외따로 살고 있으니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날도 있고.”
“의외군요.”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비서님, 그래서 굳이 여기서 숙식까지 하면서 같이 계시는 거 아닌지?”
“그게 말이지요.”


규원은 말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활짝 웃었다.


“저 친구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가 있거든요.”


순간, 화가 났다.

아주 잠깐, 의식이 덜컹거렸던 것은 지금의 이 화가 과연 어젯밤의 그 순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지를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하룻밤 든 몸정 때문에 턱없이 다니엘에게로 기울어져 버린 마음에 규원의 말이 아니꼽게 받힌 것은 아닌지, 그 일이 아니라도 응당 화를 낼만한 충분히 불편부당한 말인지, 그런 것을 확신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지훈은 방금 규원의 그 말은 그 일과 관계없이 자신을 화나게 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외람된 말씀을 좀 드려도 괜찮을지.”


공격적인 말을 꺼내려는 지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았다.


“제가 이 곳에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생님과 강 비서님과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것까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지훈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사람을 인터뷰하러 이 곳에 찾아왔다. 이런 처지에 이 사람의 비위를 거슬러 과연 자신에게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바깥은 눈이 내려 길도 끊긴 상태다. 대화가 극단의 극단으로 치달아 당장 여기서 나가라는 축객령이라도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 사실은 지훈의 입술을 조금은 무겁게 했다.


“두 분의 관계는,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훈이 명색 기자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어휘를 쥐어짜 찾아낸, 그나마 가장 온건한 표현이었다. 정상적이지 않다. 뒤틀려 있다. 왜곡되어 있다. 정신적인 학대로 보이는 소지가 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차마 그렇게까지 말해버릴 수는 없어서 고르고 골라 찾아낸 말이었다. 그것이 지훈의 최선이었다.


“일반적이지 않다, 라.”


규원은 그 말을 따라 외고는, 물끄러미 지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다니엘의 안경이 떠올랐다. 어쩌면 다니엘은 그리 눈이 나쁘지도 않으면서, 이런 순간에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그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에게 화가 아주 많이 나신 것 같군요.”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지훈은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물론,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단 몸이 불편하신 상태시고, 그런 분을 케어하기 위해서는 보통과는 다른 주의가 필요하겠죠. 그런 쪽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보살핌을 받으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가 마음에 차지 않으실 수도 물론 있을 겁니다.”


다니엘에 대한 규원의 날선 태도는, 사실 그 말로 억지로나마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제가 가장, 불편하게 여겨졌던 건.”


지훈의 입술이 한참을 공허하게 달싹였다.


“그 소설입니다.”
“소설.”
“네. 소설이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특정한 목적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것 같은 글이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규원은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벌써 그런 것까지 보여주는 사이가 되신 겁니까.”


그 말에는 기묘한 야유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미 아까부터도 생각하던 것이지만, 자신이 어젯밤 단순히 다니엘의 방에 이야기나 나누러 갔다가 잠이 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규원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 알고 있다는 쪽으로 지훈의 마음은 기울어졌다.


“물론 세상의 모든 글에는 다 제각각의 쓰임이 있습니다. 그런 글 또한 그런 글 나름의 쓰임이 있겠고요. 그것을 가지고 고상하니 저급하니, 그런 걸 따질 수는 물론 없겠죠. 그리고 세상엔 그것보다 더 쓰레기 같은 글을 쓰는 작자들이 얼마든지 있고요.”
“….”
“그러나 그게 강 비서님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 저는 좀, 납득하기가 힘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요는.”


규원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제가 강 비서를 협박하거나, 윽박질러서 그런 류의 글을 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니냐. 기자님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것이군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러나 지훈은 규원의 말에 대한 변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과연 의미가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슷합니다.”


그래서 결국 지훈은 내뱉듯이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규원은 미소를 띤 얼굴로 벌겋게 달아오른 지훈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죠. 그간의 일을 다 모르시니까.”


규원은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으로 보풀이 일어난 담요의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저 친구, 원래 그런 글을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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