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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19











다니엘은 몸이 더운 사람이었다. 긴 팔로 허리를 끌어안아 제 품 속에 지훈의 몸을 가두는 그는 의외로 별로 떨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 품이 따뜻하다 못해 더워서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저도 모를 ‘형’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입술 언저리까지 올라왔다가 스러졌다.

괜찮아요. 어디서 그런 낌새를 챈 것인가, 다니엘은 바싹 마른 지훈의 입술을 제 입술에 머금고 속삭였다. 뭐 어때.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지. 그 목소리에, 억지로 붙들고 있던 마음 한 조각마저 마저 녹고 말았다. 부실한 입술을 달달 떨며 그 길지도 않은 한 마디를 입 밖에 내고 나서야, 자신이 지난 3년간 얼마나 그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싶어했는지가 절절이 마음에 질려와 지훈은 그만 울컥,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괜찮다고, 끝없이 그 말을 속삭이며 어깨를 끌어안는 다니엘이 아무래도 의건처럼 느껴져서, 지훈은 몇 번이나 더는 뜨지 않을 듯이 눈을 꼭 감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뜨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깜빡 잠이 들었던 지훈은 선뜻한 기운에 잠에서 깼다.

벽을 향해 몸을 돌린 지훈을, 다니엘이 등 뒤에서 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어깨 위로 다니엘의 머리칼이 한 웅큼 쏟아져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지끈거려 한참이나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지훈은 다니엘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살짝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엉망으로 팽개친 속옷을, 옷을 주워 입는 손이 떨렸다. 내가 간밤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것인지. 지훈은 침대 위로 몸을 숙여, 잠이 든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눈가의 점을. 간밤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의건이 아닐 수가 있냐고.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러나 날이 새고 제 정신이 돌아온 지금, 다시 바라보는 다니엘의 얼굴은 그지없이 서먹했고, 어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지훈은, 그것이 다니엘이든 의건이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떡하죠.”


뺨 위로 흩어진 다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우린 이제 어떤 사이가 되는 거죠, 다니엘.”


하룻밤의 쾌락을 나누어 가진 알기 쉬운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다. 이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고작 이틀, 길게 잡아도 사흘이었다. 그 사이에 오간 감정에 사랑씩이나 되는 거창한 이름이 합당할 리 없었다. 오래전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꼭 그만큼이나 갑자기 사라져 버린 한 사람과 너무나 닮은 얼굴을 한 이 사람에 대한 지독한 호기심. 아무리 잘 봐준대도 고작 그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지난밤에 자신은 그런 사람에게 어린애처럼 매달려 떼를 썼고, 사람이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가장 깊은 종류의 교감을 같이해 버리고 말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랬다. 이 뜻하지 않은 ‘러브 어페어’가 이 이상 심각하거나 진지한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은 턱없이 낮았다. 이 곳은 서울에서 너무 멀었고, 지훈과 다니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가 질릴 만큼 의건과 닮은 얼굴, 조금은 답답하게 여겨질 만큼 유순하고 선량한 성품 외에, 그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아서 이 이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지, 지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어젯밤의 일은 그냥 하룻밤의 해프닝에 그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아런 말을 하면, 다니엘은 과연 받아들일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훈은 손을 들어 몇 번, 땀도 나지 않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단 이 사람을 깨운 후에―

그러나 그런 지훈의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했던지, 다니엘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아, 저.”
“지훈 씨.”


둥글게 접히는 그 눈매에, 지훈은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로의 품에 기대 잠이 들었다 깨어난 늦은 아침에, 의건은 언제나 꼭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곤 했다.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어떤 것을 대할 때처럼. 그리고 다니엘의 그런 얼굴은, 이 곳에 온 후 지금껏 본 가장 가슴 아픈 것들 중 하나였다.


“빨리 일어났네.”


그런 지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니엘은 길고 늘씬한 팔을 뻗어 지훈의 손목을 잡아당겨 껴안았다. 다니엘의 목덜미에서는 연한 살냄새가 났다. 의건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가를 더듬어 보려 했지만, 그것까지 기억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잘 잤어요?”
“응.”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어떤 것을 대할 때처럼. 다니엘은 지훈을 꼭 끌어안고 그 머리칼 속에 입술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이제 이 사람을 강 비서님 따위의 호칭으로는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에서 깬 다니엘이 옷을 입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지훈은 1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니엘의 방을 나섰다.

어느새 날이 새어, 곳곳에 난 창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그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쳐들다가, 지훈은 분명 어젯밤 지하로 내려올 때 켜 두었던 불이 꺼져 있음을 발견했다. 도대체 이 불을 누가 끈 것일까. 지훈과 다니엘은 어제 밤 내도록 함께 있었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지훈은 우뚝, 계단을 반쯤 오르던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계단 위쪽,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빤히 내다보이는 그 곳에, 휠체어에 탄 규원이 나와 있었다.


“강 비서는 볼일이 있어 밤사이 1층에 다녀가더라도 불을 켜지 않지요. 계단에 익숙하니까요. 그런데 불이 켜져 있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잠을 좀 설쳐서.”


지훈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규원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나 좀 나누려고 강 비서님 방에 갔다가, 거기서 그만 깜빡.”
“그렇군요.”


규원은 유독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쩐지, 이미 뭔가를 다 알고 묻는 듯한 기분 나쁜 여유로움이 그 표정에 묻어났다.


“그 방에서, 주무신 모양이군요.”


찔리는 데가 있어서일까, 아무래도 그 말은 단순히 그 방에서 잤다는 축자적인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타이밍이 영 좋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훈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침대가 좁았을 텐데.”


규원은 빙긋이 웃었다.


“강 비서가 제법 체격도 좋은 편이고 해서, 더더욱.”


다니엘의 침대는 좁았다. 그것은 대충 보기에도 퀸 사이즈까지나 될 리가 없었다. 지훈은 다니엘의 침대가 좁다는 것을, 여기 온 첫날에 이미 알았다. 그리고 그 침대가 그렇게까지 좁지만 않았더라도, 어제 그 일은 그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훈은 순간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아시는군요.”


지훈은 고개를 쳐들었다. 계단 몇 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규원은 실제보다도 훨씬 거대한 존재로 보였다. 아마도 휠체어의 부피까지가 모두 그의 것인 양 보여 그런 탓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시면, 조금 큰 침대 하나 놔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이미 뭔가를 눈치 채고 묻는 말이면 솔직히 그대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사람이 더 이상 우스워지지 않는 방법이었다.


“까딱하면 굴러 떨어지겠던데요.”
“침대요. 좋습니다.”


그러나 지훈의 각오와는 달리, 규원은 의외로 순순히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위잉, 하고 휠체어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규원은 층계 반대쪽, 자신의 서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늘은 제가 기자님을 좀 인터뷰했으면 하는데요.”
“그게 무슨.”
“강 비서에게.”


규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손님도 일어나신 마당에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냐고, 말씀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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