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Everybody Lies 18











자신이 의건을 ‘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어째서인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책에서든 영화에서든 본 남의 일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앞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고 ‘형’이라는 말로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친형이 없는 지훈에게는 오직 의건 하나뿐이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 ‘형’이라는 짤막한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지훈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기자님, 저기.”
“….”
“저는, 그, 기자님이 아는 그 사람이.”
“….”
“아니에요.”


다니엘의 눈이 부산하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몇 번이나 깜빡이는 그 눈꺼풀이 야속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거냐고,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냐고, 왜 그렇게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구는 거냐고, 그런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오려고 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화가 났다. 속이 상했다. 뭐가 이러냐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떼를 쓰고 싶었다.


“어떻게 나한테.”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한 때 그를 사랑했던 온 몸과 마음의 감각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라고. 그런데 정말로 그런 거라면, 이렇게나 천연스럽게 나를 모른다고 말하는 이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차라리 남이어야 나을 듯도 하고, 그래도 아닌 게 나을 듯도 했다.  


“나한테 이럴 수가.”


그래서, 지훈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것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 채 지훈의 앞에 붙들려 앉아있는 다니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말밖에는.


“왜 아냐?”


힘이 빠진 손을 들어 다니엘을 아무렇게나 한 대 때렸다. 그 손은 다니엘의 어깨 언저리에 맞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왜 아니냐고.”
“….”
“왜 아닌데… 왜.”


이어지지 못하고 토막토막 끊기는 그 목소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엄마가 원하는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울어대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서, 지훈은 손끝에 걸리는 다니엘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잡아당기고, 더러는 밀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억지를 쓰듯 잡아 흔들며 지훈은 울었다. 3년 동안 한 번도 남 앞에서 흘려보지 못한 눈물은 반짝 풀린 어느 겨울날 녹아서 떨어지는 고드름의 물방울처럼 한없이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니엘의 크고 더운 손이 물기가 번진 지훈의 뺨을 덮었다.


“울지 마요.”


의건의 앞에서 울기까지나 한 일이 뭐가 있었던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했다. 그러나 의건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니엘은 손등으로 지훈의 뺨에 난 눈물자국을 쓸어냈다. 손가락이 닿는 걸 조심하기라도 하듯이.


“왜 울어요.”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 또한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공명(共鳴)하듯이.


“마음 아프게.”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가려 부옇게 흐려진 시야가 짜증스러워 손바닥으로 대충 눈가를 훔쳤다. 제 마음 하나 못 다스려 제풀에 눈물까지 짜고, 참 잘하는 짓이라고, 지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왜 아파요.”
“몰라요.”


다니엘의 대답은 짧았고, 어째서인지 조금 퉁명스러웠다.


“기자님 우는 거 보니까.”
“….”
“나까지 울고 싶어졌어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다니엘의 안경을 벗겼다.

이 곳에 온지 만 이틀 남짓, 자주 본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안경을 벗은 다니엘의 얼굴은 또 안경을 쓴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안경까지 벗은 그의 얼굴은 이제는 차마 아니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의건과 닮아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을 마주 보는 다니엘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여기 점도 있네.”


안경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지만 다니엘의 오른쪽 눈 아래에도 점이 있었다. 의건도 그랬다. 남자가 왜 이런 데 점이 있냐고 웃었던 기억이 사무쳤다.


“몰라. 안 해.”


마치 큰 핑계거리라도 찾은 듯 지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 그 사람 아니다. 그런 말 몰라. 안 들려. 난 그런 거 몰라.”


안경을 벗겼을 때 그 점만 없었더라도 이런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을까. 물론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다니엘의 눈가에 있는 그 점을 확인하는 순간 지훈의 마음은 돌이킬 수도 없이 이지러지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난, 그런 거.”


그 순간, 다니엘의 입술이 지훈의 입술을 덮어왔다. 입이라도 막으려는 듯.

흘러내린 눈물이 입 속으로 들어가 짠 맛이 났다. 다니엘의 입 속에서는 방금 전 마신 커피 향이 났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입술이 입술을 물었다. 다니엘의 혀 끝이 지훈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훑고 지나갔다. 가쁜 숨이 엉켰다. 지훈은 애써 붙잡았던 다니엘의 소맷자락이 구겨지도록 꽉 움켜쥐었다. 길고 큰 손이 뒤통수를 헤집어 머리칼 속을 파고들었다.

뭘 어떻게 해 볼 겨를도 없이, 둘은 서로를 껴안은 채 침대 위로 엎어졌다. 만진다거나, 쓰다듬는다거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사라질까봐,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까봐 그게 두려웠다. 품을 파고드는 온기와, 가슴을 내리누르는 사람의 체중과, 함께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호흡 같은 것들. 어찌 생각하면 아주 오래 전인 것도 같고 어찌 생각하면 그다지 오래 전도 아닌 것 같던 그 어떤 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서로 끌어안고 기대 깍지 끼어 맞잡던 손 같은 것들. 더러는 입을 맞추고, 더러는 가만히 핥고, 가끔은 깨물거나, 붙잡거나, 매달리던 사람의 흔적 같은 것들. 몸을 파고드는 통증과,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하던 절정의 순간들과, 이름을 부르던 달고 짙은 목소리. 그 모든 것들. 아니, 지금은 미처 생각나지 않는, 작고, 사소하고, 안타깝고, 애가 타던 그 모든 것들까지를 전부 합한 것과 같은 어떤 것. 지훈은, 다니엘의 손끝이 셔츠의 아랫단을 파고들어 허리의 맨살에 닿았을 때 그 모든 것들을 예감했다.


“울지 마요.”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에 입을 대고 다니엘은 그렇게 속삭였다.


“왜 울고 그래. 속상하게.”


그 짤막한 말 사이사이 섞인 숨결이 귓전으로 흘러들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고 연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다니엘의 옷깃을 잡아 쥔 손아귀에는 여전히 손가락이 저릿할 만큼 힘을 준 채였다.


“지훈아, 하고 불러봐요.”


지훈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이런 거 하면서 기자님이라고 부를 거야?”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움에 눈이 멀어 이렇게라도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뿐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천히 감았다 뜬 눈이 다니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지훈은 그 얄팍한 회의가 부질없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흐릿한 감정 따위로 막아서기에는, 지금 지훈의 눈앞에 있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 황홀했기에.


“나도 그냥, 다니엘이라고 부를게요.”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