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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17











내리는 눈은 잠시 그쳤다. 그러나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내린 눈이 길에 고스란히 쌓여, 아무래도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고 다니엘은 말했다. 혹시나 싶어 터미널에 전화를 해 봤는데 버스도 다 끊겼다고 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하며, 다니엘은 그것이 제 탓이기라도 한 듯 머쓱하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하루 더 주무시고 가시죠.”


규원도 옆에서 거들 듯 말했다.


“어차피 제 인터뷰 기사가 내일 당장 실리지 않으면 신선도가 떨어지는 속보 같은 것도 아니고요.”


지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나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 듯한 그 멘트가 아니어도, 현실적으로 이 엉망으로 얼어붙은 길을 뚫고 서울로 돌아가는 건 가능하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까지 회사에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까 어떻게든 전화라도 한 통 해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통수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어차피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면 이 동네 교통사정이 도저히 서울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하고 속편하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본의 아닌 민폐는 하루로 그치면 좋겠는데요.”


지훈은 잔뜩 찌푸린 바깥하늘을 내다보며 말했다.


“길이 언제나 좀 풀릴지.”
“마음 너무 급하게 먹지 마세요. 눈이 이걸로 그친대도 길 뚫는 건 또 시간이 걸리니까.”


규원의 반응은 마지못해 하루 더 자고 가라는 듯한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제법 흔쾌해 보였고, 하루 더 자고 가라는 그의 말도 다분히 진심인 듯이 들렸다. 그렇게나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사람 치고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 만큼.


“뭐, 일부러 놀러도 오는 곳이니까요.”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오늘 좀 피곤하다며, 규원은 가벼운 저녁을 먹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특히나 규원 같이 폐쇄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기질이 강한 사람은 더더욱 그럴 터였다.

규원이 잠들고 난 후 두 사람은 다니엘의 방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오늘은 유부를 얹어 끓인 우동에 밥과 반찬 몇 가지가 나왔다. 아틀리에 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드문 넓고 큰 집 특유의 휑한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 우동의 뜨끈한 국물이 몹시도 반가웠다.


“국물 좀 더 드릴까요?”


제대로 밥을 뜨기도 전에 국물을 반 가까이 마셔버린 지훈의 그릇을 넘겨다보며 다니엘이 물었다.


“제가 국물을 좋아해서 국물 있는 음식 할 때는 좀 넉넉하게 끓이거든요. 선생님은 나이도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국물을 좋아하냐고 언짢아하시지만.”
“선생님이랑 강 비서님은 매사가 반댄가 봐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국물 같은 걸 많이 드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어지니까요. 그것만은 제 손 안 빌리고 어떻게든 혼자 하시긴 하는데, 그래도 역시 불편하긴 하시겠죠.”


지훈은 면을 집던 젓가락을 멈추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건 오피셜이에요 아니면 비서님 생각이에요?”
“그냥 제 생각인데요.”
“그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네.”
“그게 사실이 아니면요?”


내가 보기에, 선생님은 당신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지훈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입 속에 든 우동의 면발을 우물거리며 대충 그 순간을 모면했다. 다니엘 또한 그 답이 그리 절실하게 궁금했던 것은 아닌지, 굳이 지훈에게 그 답을 재우쳐 묻지 않았다.

면을 대충 건져먹은 국물에 밥을 말아서, 반쯤은 씹고 반쯤은 마시듯이,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먹어치웠다. 지훈은 설거지를 하려는 다니엘을 커피나 내리라며 밀어내고 몇 개 안 되는 그릇과 수저를 닦았다. 그라인더로 원두를 가는 다니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마도 규원이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에 조금 자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지훈은 생각했다.

정리해야 될 녹음파일이 몇 개 더 늘어났지만 이상하게 별로 일에 손을 대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잘하면 내일도 여기를 벗어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제를 미뤄놓고 놀고 있는 것 같은 착잡함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러나 지훈은 짐짓 입을 다물고, 다니엘이 내려 주는 커피를 들고 다시 다니엘을 따라 지하 방으로 내려갔다.


“이거 말인데요.”


방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주머니 속에서 예의 십자가 모양 피어싱을 꺼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그 피어싱은 더없이 낯설어져 마치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보지 않은 동급생 여자애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왜 제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까 강 비서님이 한 말마따나 선생님이 이런 걸 하고 다니실 리도 없고, 내 물건은 아니니까.

그러나 사실이 아닌 그런 대답을 하려니 저절로 맥이 풀렸다. 그런 입에 발린 대답은, 아까 자신의 마음을 옥죄던 그 다급함을 털끝만큼도 설명해 주지 못하기에.


“이거랑 비슷… 아니, 거의 똑같은 걸 하고 다니던 사람을 하나 알았어요.”


당신은 그 사람과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 때 그 사람을 사랑했었다고.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 우리도 헤어졌는데,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별했는지 그 이유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아까, 이 조그만 물건을 내 방 침대 아래서 발견했을 때 이제라도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었다는 그 말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되풀이할 자신이 없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이런 거 참 되게 좋아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또 그런 게 잘 어울렸고요. 액세서리가 아니라 무슨 몸의 일부 같았어요. 남자였는데도.”
“그랬구나.”


다니엘은 커다란 두 손으로 머그컵을 모아쥔 채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서슬에 밀크 초콜릿 냄새가 날 것 같은 다갈색의 머리칼이 가볍게 따라 나풀거렸다.


“그 분이, 전에 말씀하신 전에 사귀시던 분이에요?”
“….”


지훈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다니엘은 당황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동그란 안경 렌즈 너머로 흔들리는 그 눈빛이 뚜렷이 보였다.


“아, 저기, 그런 거 아니시면 죄송해요.”


다니엘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냥.”
“어떻게 알았어요?”
“네?”
“사귀던 사람 남자였다고, 그 말은 안한 거 같은데.”
“그냥, 방금 기자님 표정이, 어젯밤에 사귀던 분 이야기할 때랑 똑같아서요. 그래서.”


표정이, 같았다.
지훈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의건이 사라져버린 지난 3년, 지훈은 그 누구에게도 의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부모에게도, 가족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애초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사실 자체가 비밀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의건은 어디까지나 ‘지훈이 좋아하는 작가’였고 ‘그러다가 친해진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가슴앓이 같은 것은, 공식적으로는 지훈에게 허락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상처받거나, 앓아눕거나, 슬퍼하는 것은 단순한 ‘팬’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입을 다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문득 연락이 끊어져 타인으로 돌아가 버리는 수많은 다른 가벼운 인연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제 때 드러내놓지 못한 상처는 그대로 나은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한없이 곪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지훈은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저기.”


그래서, 그렇게 입을 떼는 지훈의 목소리는 일정 부분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 몰라요?”
“네?”
“나, 진짜 몰라?”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 끝에 물기가 스몄다.


“왜 날 몰라?”
“기자님.”
“어떻게… 아닐 수가 있어?”


지훈의 떨리는 손가락이 놀라 굳어진 다니엘의 뺨을 건드렸다.


“형이잖아.”
“….”
“형…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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