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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16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침보다 더 많이 오는 듯도 보였다.

간신히 젠더를 찾아 노트북에 물린 핸드폰을 들여다 보니 안테나가 한 개 정도 켜져 있었다. 다급히 핸드폰을 집어들고 부랴부랴 회사에 전화를 했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은 것 같기는 한데 감이 먹통이라 저 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내 말이 제대로 들리기는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지훈은 짜증스레 혀를 차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몰라.”


지훈은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인터넷이 될 테니까 이 근방에 길이 끊겼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놀다가 연락이 두절된 것도 아니고 폭설 때문인데, 그걸 무단결근으로 처리해서 함부로 해고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윤규원 단독 인터뷰는 그 길로 다른 신문에 나갈 거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괜히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 보는 지훈이었다.


“몰라, 몰라.”


이미 한 말을 괜히 한 번 되풀이하고, 지훈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아까 그 피어싱을 다니엘에게 줘 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되는 것이었을까.










오후 인터뷰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오후에 다니엘이 내려다 갖다 준 커피는 지훈도 이름 정도는 아는 케냐 AA였다. 저는 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인데, 저 친구가 이 커피를 좋아한다고 규원이 주석을 달았다. 이런 눈 오는 날에 마시는 것은 나름 나쁘지 않은 듯도 하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지훈은 다니엘에 대한 규원의 말은 참 그 뉘앙스가 미묘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오후 인터뷰의 주제는 처음에는 규원의 작품 활동이었다. 거의 만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이제 좀 화가의 인터뷰다운 내용으로 넘어왔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은 규원의 화풍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 흔치 않은 작품의 형식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규원은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소년이 가질만한 취미는 책을 읽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 뿐이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들었고, 몇 년 전부터는 오래된 트로트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가사만 놓고 보면 요즘 노래들보다 훨씬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많다는 말을 하며, 규원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하는 ‘선창’과 ‘구름도 낯설은 영을 넘어서 정처 없는 단봇짐에 꽃비가 온다’는 ‘대지의 항구’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다음 작품을 그리게 된다면 아마 그 두 곡 중 한 곡이 주제가 될 것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지훈은 ‘선창’과 ‘대지의 항구’라는 곡 제목 아래 몇 번 두껍게 밑줄을 그었다.


“커피 다 드셨으면 조금 더 부탁할까요?”
“아, 네. 그래주시면.”


일단 고개를 끄덕여놓고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조금 전부터, 아니 실은 오후 내내 입 속을 맴돌고 있는 이 말을 차마 묻어놓지를 못하고.


“저, 강 비서님 말인데.”


결국 어렵게 입을 떼어놓고 지훈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씹었다. 지금 이 자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풀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명색이 기자라면서, 엄연히 일하는 중에 이런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되는 것인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질문을 할 곳은 규원 밖에는 없었다.


“언제부터 같이 일하셨나요?”
“다니엘이요. 3년 정도 됐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쓴 소리를 들을 것을 각오했다. 왜 인터뷰 중에 화제가 그 쪽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그러나 규원은 의외로 선선하게 지훈의 질문에 답했다.


“사실 저 친구와 저는 악연이라고 보아야지요.”
“악연이요?”
“네. 첫 만남이 그다지 좋지가 못했어요.”


규원은 지그시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저로서도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도 될지 좀 감이 안 잡히는데. 저 친구에게도 나름의 과거사가 있어서.”
“과거사요?”
“자살을 기도했거든요. 여기서.”
“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서, 지훈은 부랴부랴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그러나 순간 지훈이 느낀 당혹감은 지하에 내려갔다가 책상에 머리를 부딪고 있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본 그 때만큼이나 강렬했다. 자살이라니.


“자살 기도라니. 전혀 그러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네, 지금은 그렇죠. 지금은 또 나름 너무 해맑아서 사람 속을 뒤집는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그게 문제지만.”


그 말은 어딘가 미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지훈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저는 원래 이 아틀리에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낮에 들러서 필요한 가사 일을 해 주시는 산 아래 동네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고, 밤에는 저 혼자 지냈죠. 서울도 아닌 이런 외진 곳에, 침식까지 해 가며 성질 까다로운 장애인의 뒷바라지를 해 줄 사람은 가족 말고는 없습니다. 그쯤 되면 그건 이미 돈의 문제가 아니죠. 연봉을 억 정도 줄 수 있다고 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하나 뿐인 누나는 죽었고, 살아 있었더라도 규원이 그녀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인가는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부모님 또한 아마도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시다 하더라도 자식의 수발을 들기 힘들 만큼 노령이실 테고.


“그 날도 이렇게 눈이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길이 끊길 정도의 폭설은 아니었지만요.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 봤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몸이 이러니, 나가서 문을 여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도저히 문을 열어주지 않고는 안 될 만큼 간절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죠. 그게 강 비서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온 건지, 눈을 잔뜩 맞고는,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더군요.”
“….”
“멀쩡한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였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힘든 일을 겪은 것 같았죠. 이렇게 눈이 오는 밤에 산 아래로 내려가는 건 무리니,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규원은 언짢은 표정으로 눈동자를 좌우로 한 번 굴렸다.


“다음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고 하더군요. 전날 줬던 제 명함을 보고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알았습니다.”
“차에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앓는 소리를 냈다. 대화가 끊긴 서재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것도 인연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규원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때마침 강 비서가 아틀리에에 찾아온 날이 누나의 기일이었습니다. 하필 누나가 죽은 날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해서 병원에 실려 왔다는 건,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 몸까지 다친 사람이어서, 저도 마침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니, 그냥 이 외진 곳에서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더랍니다.”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그지없이 복잡해졌다. 허탈한 것도 아니고 안타까운 것도 아니고 후련한 것은 더더욱 아닌, 그 자신조차도 근원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짙은 안개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강 비서 이야기는 왜 물으시는지?”


여기서 지훈은 잠시 갈등했다. 규원에게 의건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 해도 될지. 한다면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지.


“제가 알던 사람 하나하고 강 비서님이 굉장히 많이 닮으셨어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쓸어덮기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아, 지훈은 그냥 그 정도 선에서 대충 말하기로 했다.


“한 3년쯤 전에 연락이 끊겼는데, 그것 참 묘한 공통점이네요.”
“그런가요.”


규원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깍지 끼어 다리를 덮은 담요 위에 놓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니엘은 기자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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