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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13











그 날의 인터뷰는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 시작되었다.

인터뷰라고 하기에는 잡담이나 신변잡담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어젯밤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를 다 털어버린 때문인지, 규원의 이야기는 학창 시절로 넘어갔다. 어린 시절의 그는 미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몸이 그렇게 되고 보니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음악에는 소질이 없었고 공부는 하기가 싫더라고요.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미술 밖에 없었어요 라고.


“몸이 그렇게 되고 나서, 부모님은 저에게 안 된다는 대답을 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규원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저는 집안의 작은 폭군처럼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힘들게 요리해주신 음식을 한 입만 먹고 집어던지거나,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온 집안 식구가 다 달려올 때까지 이유도 없이 괴성을 지르거나, 뭐 그런 등등의 못된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댔죠. 그땐 그냥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미웠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규원의 눈이 어쩐지 착잡한 빛을 띤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마 누나가 집을 나간 건 저 때문이었을 거예요. 다른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찾기가 힘드니까요.”
“누님이 가출을 하셨나요?”
“아니요, 가출이라기보다는 집을 떠난 거죠. 누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기숙사에 들어가게 돼서, 집에서 나갔습니다.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이 기숙사라니, 저와 한 집에 사는 게 너무나 괴로웠던 거겠죠.”


필기를 하던 지훈의 손이 잠시 멎었다.

1의 행동에 1의 대가만이 따르는 게 인생이라면 얼마나 쉽고 편할까.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의 행동에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이상의 대가가 따르는 일이 너무도 흔했다.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남동생을 혼내주려는’ 의도 이상일 리 없을 그녀의 조그만 악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았고, 결국 그녀에게도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간 소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저지른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는 것 밖에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저도 참 어지간했던 것이, 짐을 다 싸고 인사를 하러 온 누나에게 집에서 나가면 그걸로 끝일 줄 아냐고, 내가 평생 널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라는 막말을 했습니다. 누나는 기어이 울면서 제 방에서 나갔죠.”


마지막쯤에서 규원의 목소리는 지그시 메어 흔들렸다.


“그게 누나를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네요. 그 때의 저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의로 가득 차 있어서, 그보다 더 한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니, 그 날 이후로 누님과는 의절이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다만 누나는 그렇게 집을 떠난 후 다시는 집에 오지 않았어요. 가끔 부모님에게 안부 전할 겸 전화나 더러 할 뿐이었죠. 부모님과 따로 밖에서 만난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집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몸이 불편한 상태라 따로 누나를 만나러 가거나 할 수는 없었고요.”


그쯤에서 규원은 입을 다물고 책상 위에 놓인 펜 스탠드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누나를 한 번만이라도 만날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그 당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으니까요. 제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그래도 할 말과 안할 말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된 후에 한 번만 누나를 만났더라면. 그래서 이젠 괜찮아졌다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는 괜찮아졌다고, 그런 말을 했더라면.”


규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지훈을 바라보았다.


“누나도 저도, 조금은 행복해졌을까요.”


그 말은, 지훈이 지금껏 들은 규원의 모든 말 중 가장 진심처럼 들렸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지훈은 녹음기와 노트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다니엘에게서 흘끗 들은 이야기지만, 이 저택에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공간이 없다고 했다. 식사는 각자 방에서 따로 한다고, 규원이 자신이 뭔가를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거동이 불편하니 음식을 먹는 것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그러는 모습을 ‘아랫사람’인 다니엘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노트북을 켜 녹음기를 연결하고, 오전에 한 인터뷰 녹음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멍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지훈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빼꼼이 문이 열리고, 트레이에 받힌 점심식사를 든 다니엘이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지훈은 허둥지둥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 책상에 트레이를 놓을 여백을 만들었다.


“뭐 딱히 가리는 음식 있으시다는 말씀을 못 들어서 그냥 이것저것 챙겨 왔어요.”
“네, 뭐 딱히 가리는 건 없고 없어서 못 먹는 건 많은데.”


지훈은 곁눈질로 다니엘이 들고 온 트레이를 쓱 둘러보았다. 별다른 무늬가 없는 연청색 찬기에 김치, 나물, 계란찜, 감자조림 등의 밑반찬과 생강돼지고기볶음이 한 접시, 가운데 부분에 검은 깨를 조금 뿌린 밥과 버섯이 들어간 된장국 등이 차려져 있었다.


“반찬 엄청 많네요.”


지훈은 감탄했다.


“이걸 강 비서님이 다 하시는 거예요?”
“무슨요. 제가 이런 걸 다 하는 재주가 있으면 벌써 도망가서 어디 식당이라도….”


실컷 말을 해놓고 나서야 어딘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다니엘은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아, 저 그러니까. 뭐 도망가고 싶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러나 그 말투는 다분히 변명조였다.


“인근에 필요한 물건들 사러 갈 때 백화점 식품부 들러서 사와요. 다행히 선생님이 거기 반찬을 좋아하셔서. 저는 그냥 다시 굽거나 데우는 것 정도만 해요.”
“다행이네요.”


저도 모르게 가시돋힌 목소리로 지훈은 대답했다.


“어차피 청소도 빨래도 다 강 비서님이 할 거잖아요. 거기다가 밥까지 하시는 줄 알았네요.”
“저기, 기자님. 저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마운데, 선생님이 저를 데려다 막 부려먹고 그러고 계시는 건 아니에요.”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시다 보니까 모르는 사람에게 본인의 일을 맡기는 걸 굉장히 꺼려하세요. 이 아틀리에 안에는 사람이라고는 선생님이랑 저 둘 밖에 없으니까, 아무래도 몸이 멀쩡한 제가 이것저것 하게 되는 거고요. 어쨌든 저는 여기서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안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제발 여기서 멈춰주세요.

지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 속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부조리하다는 것,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것, 어딘가 잘못돼 있다는 걸 다니엘이라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규원의 시중을 들고, 밤에 되면 방에 돌아와 규원이 읽을 도색소설을 쓰느라 밤잠을 설치는 나날. 이런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그라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바꿀 수 있을 것인지, 지훈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자꾸만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들쑤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도.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는 혼자서 밥 잘 못 먹는 체질이라.”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의건이 사라진 후 몇 달 간, 지훈은 거의 혼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꼭 그 시절의 기억이 아니어도, 껄끄러운 사람과 같이 밥을 먹느니 혼자서 밥을 먹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니엘은 지금 이 상황을 점점 더 불편하게 여기고 혼자 안절부절못할 것 같았다. 그건 지훈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저랑 같이 먹어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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