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Everybody Lies 7











그 에두르지 않은 거절의 말은, 순간 생각보다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저도 모를 머쓱함을 견디지 못하고 지훈은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언짢음이라기보다는 안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솔직히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사람에게 필요 이상 무장 해제를 강요한 자신에 대한 후회가 대부분인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당장 그 자신부터가 제대로 매조지 되지 않은 기사를 편집장이 제멋대로 열어본 일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 기억이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지훈의 의식 속을 스쳐갔다.


“아, 저.”


그러나 이 상황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제법 야무지게 말을 맺은 다니엘은, 그러나 제 말이 초래한 파장이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는지 쩔쩔 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지금 제 글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서 그러니까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
“그, 습작중인 글이라는 게, 어, 뭐라고 하지, 아침에 일어나서 막 머리도 까치집이고 눈곱도 붙어있고 입 냄새도 나고 막 그런 얼굴로 애인 만나러 나가는 그런 거랑 비슷해서….”
“뭐 어때요.”


짐짓 장난기가 돋아, 지훈은 그렇게 말해 보았다.


“내가 뭐 강 비서님 애인도 아니고.”
“….”


그러나 그 말은 기껏 이 상황을 수습하려던 다니엘을 더 당황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는 기껏 짓던 웃음마저 잊어버린 채 표가 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법 크고 손가락이 긴 손을 부산스레 움직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것 같아 보여, 지훈은 그런 다니엘을 향해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 강 비서님 진짜 농담 안 먹히는 타입이네요.”


아직도 벌건 기가 남아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훈은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는 듯이.


“별다른 뜻은 없어요. 다른 일들도 그런 경우 많긴 하지만 글은 특히나 한 번 막히면 글 쓴 사람이 스스로 돌파구 찾기가 힘드니까. 근데 누가 옆에서 지나가듯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에서 글이 풀리기도 하고.”


그 말은 지훈의 말이 아니라 의건의 말이었다. 의건은 글을 쓰다 막히면 지훈을 붙잡고 글 이야기를 하거나, 숫제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들이 사귀기도 한참 전, 지훈이 인터넷에 연재되는 의건의 글에 답글을 달던 시절부터의 일이었다. 의건은 그렇게 말했다. 숨은 그림 찾기 같은 거라고.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쓱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쉽게 띄기도 하는, 그런 거라고.


“예, 사실 그렇죠.”


다니엘은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고 웃었다.


“지금 글 상태가 저렇게까지 엉망만 아니면 저도 좀 보여드렸으면 좋겠는데.”
“그럼 다음에 보여주세요.”


다음, 언제.

지훈은 쓰게 웃었다. 방금 자신이 한 그 말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맞닥뜨린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에게 언제 술 한 번, 밥 한 번 하고 건네는 인사만큼이나 공허하고 뜻없는 것이었다. 과연 자신에게, 다니엘의 습작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나 할 것인지 지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생각건대 방금의 그 말은 다니엘에게 당신의 거절이 내게 그리 큰 무안이나 민망함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 근데 여기까진 무슨 일로?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그건 아니구요. 인터뷰한 거 녹음 정리하다가 커피 한 잔 생각이 나서 나왔는데 뭘 어째야 되는지 모르겠어서.”
“아, 커피.”


다니엘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습작 외의 다른 화제거리가 생긴 것이 반갑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올라가시죠. 저도 한 잔 마시게요.”










지하 쪽 층계에는 정말로 불을 켜는 스위치가 없었다. 늘 이 길을 다녀버릇 하는 다니엘은 꽤나 익숙하게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지만 그렇지 못한 지훈은 내려올 때와 비슷하게 난간을 붙들고 한 발 한 발 안간힘을 써야 했다.

1층으로 올라온 다니엘은 익숙한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갔다. 그 속에는 언뜻 보기에도 십여 가지쯤 되는 원두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밀폐용기 속에 들어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꺼낸 것은 그 가장 뒤쪽에 있는, 미리 분쇄해 놓은 원두커피였다.


“그라인더 꺼내면 시끄러워서요.”


물어보지도 않은 말에, 미리 대답이라도 하듯 다니엘은 말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 건 아닌데, 그냥 제가 조심스러워서.”


원두커피를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는 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분쇄하는 거라는 정도는 그다지 커피에 깊은 조예가 없는 지훈조차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다니엘이라고 해서 미리 갈아둔 커피를 더 좋아할 리는 사실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한 그 나름의 궁여지책일 터였다.


“네.”


그래서 지훈은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하실 거 같긴 해요.”


다니엘은 능숙하게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깔고 그 속으로 분쇄한 원두를 떠넣었다, 드립 포트가 옆에 있었지만, 그는 그냥 긴 소매로 주전자 손잡이를 감싸 쥐고는 드리퍼에 물을 부었다. 지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유리 서버 속으로 내려지는 커피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 사이 다니엘은 다 내려진 커피를 머그잔 두 개에 나누어 담고는 하나를 지훈에게 내밀었다.


“향 좋네요.”


규원에게는 다소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까 서재에서 마신 그 커피는 천 개의 언덕 운운 하는 규원의 찬사에 비해 지훈에게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정말로 그 커피가 별 것 아니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커피에 대한 기호가 그다지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이 커피는 뭔가요? 아까 선생님께 얻어마신 커피는 르완다 뭐라고 들었는데.”
“르완다 엔코로 슈프림요.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커피죠.”


다니엘은 머그잔을 눈 높이까지 들어올려 들여다보았다.


“이 커피는 그냥 블렌드. 싱글 오리진 같은 거 아니고요.”
“블렌드요?”
“네, 저는 그냥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블렌드가 좋아서.”


그러니까, 아까 원두가 선생님 것과 자신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한 게 이런 의미였나. 지훈은 괜히 머그컵 속에 든 커피를 한 번 들여다 보았다.


“선생님하고는 오래 알고 지내셨어요? 두 분 사이가 굉장히 격의 없어 보이던데.”


격의 없다는 표현은 사실 옳은 표현은 아니었다. 다니엘을 대하는 규원의 태도는, 격의 없다기보다는 일방적인 하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점을 직접 지적하는 것은 때로는 생각 이상으로 듣는 사람을 상처줄 때가 있다는 것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3년 정도 됐을까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고.”


3년. 그 낯설지 않은 시간의 간격에 지훈의 마음은 다시 잘게 흔들렸다.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며, 지훈은 다시 한 번 다니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닮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등을 맞대고 있다고나 해야 납득이 가능한 정도의 유사성이 거기에 있었다. 같은 사람인 것도 같고, 그러나 어찌 보면 같은 사람이 아닌 것도 같은 이 당혹스러움의 어떤 지점에, 굳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지하까지 내려간 자신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 몸이 불편하시다 보니까 좀 예민하기도 하시고, 그리고 제가 좀 둔한 면도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요.”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과거에 그런 일 있으셨던 건 저도 오늘 기자님이랑 인터뷰 하시는 거 듣고서야 알았어요.”
“아, 아까 그럼 꽤나 오래 밖에 서 계셨던 거예요?”
“네. 커피 다 드셨을 것 같아서 좀 더 드릴까 하고 갔는데 너무 심각한 얘기 중이셔서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네요. 그냥 그 얘기 듣고 이해가 됐어요. 선생님 사람 대할 때 좀, 뭐랄까.”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듯 하던 다니엘은 결국 말을 맺지 못했다. 지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 있긴 그렇고, 비서님 방으로 갈까요.”


자기가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버리면 다니엘은 층계 옆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고 그 캄캄한 층계를 내려가 자신의 방으로 가야 할 것이었다. 손에는 커피가 가득 찬 머그컵까지 들고.


“거기가 얘기하긴 더 좋을 거 같은데.”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3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