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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6











본래 길에 버리는 시간까지 이틀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차라, 첫날 인터뷰에서 신상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밖에 건진 것이 없다는 것은 지훈을 살짝 당혹스럽게 했다. 이래 가지고야, 내일 안에 인터뷰를 다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지훈은 그 문제에 대해 필요 이상의 깊은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잘 오지 않아, 지훈은 그냥 오늘 한 인터뷰 내용이나 미리 정리해 두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녹음기를 재생 모드로 돌린 후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들과 그에 대해 규원이 한 대답들을 천천히 파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던 나무 계단, 늘 뛰던 자리에서 한 발 정도 앞선 곳에서 뭔가에 발이 걸린 느낌, 3일이 지난 후, 자신이 앞으로 몇 십 년이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 내내 영영 제 발로 걸을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재생되었다.

이 사람은, 그냥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든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문득 지훈은 그런 생각을 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인 작가 낙찰가 최고 기록을 갱신한 화가라는 것. 물론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평생 휠체어가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처지가 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선뜻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홉 살, 아주 어린 시절 닥쳐온 그 사고는 그의 인생을 그야말로 불가역한 방향으로 뒤틀어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그림 또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과연, 그 일이 남긴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을까.

문득 커피 한 잔 생각이 났다.










지훈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왔다.

인적이 없는 거실에는 군데군데 조도가 낮은 램프들이 켜져 있을 뿐, 온통 어둠 속에 잠긴 상태였다. 요즘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보고, 지훈은 지금 시간이 새벽 한 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피 생각이 났다지만 자신의 집도 아닌 데다 이렇게 넓은 저택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훈은 한참동안 거실 곳곳을 서성거리며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니엘 생각이 난 건 그 때였다. 지하에 있댔던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라던 그 목소리가 생각났다.

솔직히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규원의 기상 시간이 일곱 시라고 했으니까, 아마 다니엘은 그보다 일찍 일어나 규원을 깨워야 할 것이었다. 혹시나 자고 있다면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자는 사람을 깨워야 하는가에 대해 지훈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단 자는지 아닌지나 한 번 확인해 보고, 자고 있으면 억지로 깨우지는 말자고 지훈은 마음을 정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지훈은 손을 더듬어 난간을 잡았다. 조심스레 계단을 디디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착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울려 퍼졌다. 지훈의 걸음을 따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흔들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째서인지, 어린 시절 살던 집 목조 계단을 묘사하던 규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계단은 매우 길었다. 아니, 어쩌면 실제보다도 길게 느껴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난간에 의존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갔으므로. 그렇게 내려온 지하층은, 다니엘의 말마따나 무서울 만큼 조용하기는 했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거슬릴 정도였다. 이렇게나 조용한 걸 보니, 아마 다니엘도 이미 잠자리에 든 것은 아닐까 하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훈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어떤 단단한 것에 다른 단단한 것을 툭툭 부딪치는 듯한 소리였다. 그 파장은 몹시 둔탁하고 무거웠으며, 동시에 스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훈은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는 어떤 문 너머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 문은, 규원의 서재 문과도 달랐고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방의 문과도 달랐다. 지금 지훈의 앞에 서 있는 문은 훨씬 더 두텁고 육중해 보이는 문이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삐걱, 소리를 내며 손잡이가 돌아가는 순간, 지훈은 어째서인지 푸른 수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혹시나 창고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사람이 쓰는 방이었다. 그 방은 그리 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휑하고 황량해 보였다. 침대 하나, 벽을 면한 책상 하나가 고작인 그 방 안에는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사람 하나가 책상 앞에 앉아, 책상에 이마를 툭, 툭 부딪히고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난 인기척에,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엇.”
“어.”


그리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흠칫 놀랐다.


“강 비서님.”
“기자님.”


다니엘은 벌떡 일어나 지훈의 앞으로 왔다. 도대체 얼마나 머리를 책상에 부딪치고 있었던 것인지 안경이 콧잔등 한참 아래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그 안경이 너무나 아슬아슬해 보여, 지훈은 하마터면 손을 뻗어 그 안경을 밀어올려줄 뻔 했다.


“아니 여기 왜 이렇게 컴컴해요. 아무리 밤이지만 이래 가지고 어떻게 다녀요.”
“어, 불 안 켜고 오셨어요? 계단 옆에 스위치 있는데.”
“아, 그래요? 몰랐어요.”
“네. 1층 계단 옆에는 스위치 있어요.”


그 말의 어느 부분이 지훈의 귀에 거슬렸다. 1층 계단 옆에는 스위치가 있다는 말은, 지하의 계단 옆에는 스위치가 없다는 말일까. 아닌 게 아니라 같은 전등의 스위치가 각각 다른 두 곳에 달려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럼,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갈 때 불을 켜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일까.


“근데 뭐하고 계세요.”


그다지 밝지 않은 전등 불빛 아래서도 제법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가 보였다.


“왜 자해를 하고 그래요.”
“자해까진 아니고.”


다니엘은 머쓱하게 웃었다.


“글이 안 써져서요.”


아. 이 사람 습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글이 써지지 않는 상태’라면 지훈도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예전의 의건도 그랬다. 담배가 늘고, 신경질이 늘고, 가끔은 정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명랑해지곤 했었다. 그의 작업실에 붙어앉아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의건도 글이 써지지 않아 책상에 이마를 처박는 저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 하긴 아까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강 비서님 글 쓰시는 분이라고.”
“네? 선생님이 그런 얘길 하셨어요?”


다니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왜요. 습작하는 거, 비밀이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기라도 하듯,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이거든요. 선생님이 다른 사람한테 저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게요.”
“그럼 뭐라고 소개하시는데요?”
“그냥 뭐, 비서, 정도로.”


그러고 보니 그 부분도 어딘가 좀 의아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왜 글 쓰는 사람을 비서로 두고 있을까. 아무래도 비슷한 일을 하거나 했던 사람이 조금 더 규원을 잘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 글 제가 좀 봐도 돼요?”


지훈은 웃었다.


“이래 뵈도 문화부 기자예요. 어쩌다가 화가를 인터뷰하러 오긴 했지만 원래는 문학 담당이고요.”
“….”
“지금도 어지간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에요.”


순간 다니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업 시간에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건네줄 쪽지를 쓰다가 들킨 소년처럼.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보여드릴 만한 글은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훈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사귀던 사람도 작가였거든요. 그 사람도 맨날 초고 쓴 거 저한테 보여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니에요.”


그러나 다니엘의 대답은 지훈이 각오한 것 이상으로 완강했다.


“별로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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