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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5











지훈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가, 서재 문 뒤에 서 있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은 자신이 이 불편한 상황의 목격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저는.”


다니엘의 목소리는 의건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풍부했으며 곧잘 그 말꼬리가 웃음으로 흐려지곤 했다. 다니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는 않았다지만 그의 목소리 또한 어느 정도는 그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딱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말씀하시는 데 방해될까봐.”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게 더 방해가 될 거르는 생각은 안 해봐?”
“아, 그게.”


저런 표정을 알고 있다. 할 말이 있는데, 할 말이 많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런 얼굴.


“죄송합니다.”


그러나 결국 다니엘은 변명 혹은 해명 대신 그런 말을 겨우 한 마디 뱉아내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규원은 말없이 혀를 찼다. 그의 혀 차는 소리는 너무나 파장에 뚜렷해 귓바퀴를 뚫고 들어와 고막에 고스란히 박히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소리에 지훈이 더 낯이 뜨거워졌다.


“아, 안 그래도 커피가 맛있어서 좀 더 부탁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참이긴 했는데요.”


그것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이 자리에는 엄연히 손님인 나도 있으니 내 눈을 생각해 달라는 일종의 의사진행발언 같은 것이었다.


“일단 커피 좀 더 부탁드릴까요, 그럼. 선생님도 좀 더 드실 거죠?”


그 순간, 자신에게로 돌려지는 규원의 눈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가는 것을 지훈은 느꼈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서버 채로 두고 가.”
“네.”


다니엘은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들고 있던 커피 서버를 쟁판 채로 놓았다. 그리고는 필요 이상으로 깊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지훈은 몸을 틀어,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뽀얗게 더운 김이 서린 서버 속에 담긴 커피를 지훈의 잔에 따라주며 규원은 말했다.


“여러 가지로 모자란 점이 많은 친구인데, 특히나 눈치가 별로 없는 편이라.”


지훈은 그 말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나서서 다니엘의 편을 드는 것이 그에게 좋은 일일지 아닐지, 그것이 판단되지 않아서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누님, 이야기를.”
“아.”


규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야기 맥 끊어놓는데 귀신 같은 재주가 있죠. 저희 강 비서가. 저래 가지고 글은 어떻게 쓰는지.”
“아, 글 쓰시는 분이신가요? 강 비서님?”
“예. 뭐 등단 작가는 아니고, 몇 년째 습작 중입니다. 뭐랄까, 하는 걸 보면 왜 그렇게 헛심을 쓰고도 등단을 못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글을, 쓰는 사람.

의건 또한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등단을 못한 습작가는 아니었고, 그는 제법 문단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촉망 받는 신인 작가였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 쯤은, 두 사람 모두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 어이없이 허물어졌다. 그 사실에 한눈을 파느라, 지훈은 이번에도 규원이 다니엘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아픈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모래를 한 줌 집어먹은 것 같은 입이 까칠한 느낌은 남았다. 지훈은 더 이상 규원의 입에서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이 자신이 덜 불편해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누님과 화해는 하셨는지요?”
“화해라,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이, 서로 껴안고 눈물 쏟으며 하는 그런 화해 같은 건 못했습니다.”


규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누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제게 사과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날 누나에게 퍼부은 심한 말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고. 의절이라도 하고 다시는 보지 않았느냐 하면 뭐 그랬던 것은 아닌데, 그냥 누나도 저도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둥 하는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이지요. 한 번 깨져버린 유리는 그저 잘 붙여놓을 수가 있을 뿐 깨지기 전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다는 걸.”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아무래도 새로 따른 커피는 처음 내린 커피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 안 듣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낫긴 하더군요.”










규원과의 인터뷰는 두어 시간 쯤 더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지면에 실을 만한 이야기보다는, 규원의 살아온 이야기에 대한 사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지훈이 그 사실을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밤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하루 만에 다 인터뷰를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훈은 밤이 깊었으니 남은 이야기는 내일 계속 하시자는 인사를 남기고 서재를 물러나왔다. 녹음기와 노트를 챙겨서 서재를 나오는 지훈과 엇갈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다니엘이 서재 안으로 들어가 커피 잔과 서버를 챙겨들고 나왔다.


“아무래도 하루 주무셔야 되실 것 같다고.”
“네. 이야기가 좀 길어지네요.”
“예, 선생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방 안내해 드릴게요.”


다니엘은 지훈을 앞서 한참을 걸어갔다.

대리석 타일이 깔린 복도 양 옆으로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 그림 모두가 규원의 그림일까가 잠시 궁금해졌지만 지훈은 굳이 그런 것에까지 마음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몇 발 앞에서 걸어가는 다니엘의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 다니엘은 방 하나에 멈추어 섰다. 그 방은 작은 호텔 객실 정도의 크기였고, 침대와 책상, 작은 암체어 정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조명이 바깥에 비해 조금 어두운 듯도 느껴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안락한 맛이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지훈은,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이 이미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다니엘이 미리 갖다 놓은 것 같았다.


“손님용으로 준비해 놓는 방입니다. 한동안 찾아온 손님이 없으셔서 거의 새 방이나 다름없어요.”


다니엘은 책상 위에 여기까지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편히 쓰시고,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시면 지하에 내려오시면 제 방이니까, 그리로 말씀 부탁드릴게요. 자고 있으면 깨우시면 됩니다.”
“지하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아니 왜 방이. 집이 이렇게 넓은데, 위에도 방 많을 것 같은데.”
“아.”


다니엘의 얼굴에 난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녜요, 제가 밤에 시끄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지하가 되게 조용하거든요.”


지훈은 입을 다물고 다니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가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순간도 더러 있다는 것을 지훈은 경험으로 알았다.


“밤에 시끄러운 거 싫어하면.”


그래서, 지훈은 짐짓 그렇게 말해 보았다.


“무슨 일 있어도 깨우면 안 되겠네.”
“아니,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뭔가를 변명하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워 지훈은 다니엘을 향해 손을 내저어 보였다.


“농담이에요. 농담. 강 비서님 은근히 농담 안 먹히는 타입이시네.”


지훈은 자신이 하룻밤 묵을 방을 구석구석 빙 둘러보았다. 낯선 곳에 왔으니 신경이 곤두서야 정상일 텐데, 먼 길에 피곤한 탓인지 오늘은 별로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생님 목욕하시는 것 좀 도와드리고. 선생님이 대부분 알아서 하시는데,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시니까 아무래도 제가 좀 도와드려야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러시겠지요.”


방 안을 둘러보던 지훈의 눈에, 다니엘이 여기까지 들고 온 쟁반 위에 놓인 커피잔 두 개와 커피 서버가 보였다. 정확히는, 그 바닥에 말라붙은 커피 얼룩이.


“오늘 수고하셨어요. 방 잘 쓸게요.”
“네.”


다니엘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쟁반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체격에 비해 조용히 걷고,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웃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져 자꾸만 눈에 밟히는 점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 어두워진 방 밖으로, 소슬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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