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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4











지훈은 규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녹음기와 노트, 펜을 꺼냈다. 규원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녹음기의 설정을 확인하는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지만 노트북을 안 쓰시나요?”
“씁니다. 가지고 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사용은 안 하시는 건가요?”
“노트북을 가지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판 치는 데 신경이 쏠려서 정작 인터뷰이가 하는 말을 다 놓치게 되더라고요. 제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요.”


귀찮더라도 인터뷰를 할 때는 노트북을 쓰는 대신 녹음기를 쓰고, 그 대신 인터뷰이에게서 느껴지는 순간의 감상을 메모한다. 그것이 지훈이 처음으로 혼자 터득한 인터뷰 잘 하는 스킬이었다.


“처음 혼자서 인터뷰를 하러 나갔는데, 인터뷰이가 말씀하시는 걸 놓치지 않으려고 받아쓰기 하듯이 열심히 타자만 쳤거든요. 그러고 나서 사무실 돌아와서 기사로 옮기려고 파일을 딱 열었는데, 이 분이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이 얘기를 하셨는지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두어 번 더 그런 일이 있고, 인터뷰를 제대로 하려면 이런 식은 곤란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훌륭합니다.”


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인터뷰어를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문득, 편집장에게서 처음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졌던 가장 근원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인 최고 낙찰가를 갱신한 화단의 스타를 인터뷰하고 싶어 안달이 난 곳은 많을 텐데, 왜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매체의 갓 신참 면한 자신을 지명해 인터뷰를 제안했는지.

그러나 그 질문을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훈은 녹음기를 규원 쪽을 향해 놓았다.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인 작가 최고 낙찰가격 기록을 갱신한 것부터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녹음기를 켠 때문인지 규원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흔히 있는 일이다.


“경매 결과에 대한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사실, 그렇지요. 경매에서 그림의 낙찰가가 얼마냐, 하는 게 그림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인 잣대는 될 수가 없습니다. 제 그림의 낙찰가가 10억인데, 그럼 낙찰가가 1억인 작품들에 비해 제 그림이 열 배의 가치가 있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해놓고, 규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가 모범 답안이죠. 수능 시험 준비는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 철저히 같은 들으나마나 한 대답.”


규원은 슬쩍 웃었다. 그는 장애인에다 분명 평균 이하로 야윈 체격이었지만, 그 체격을 제외한 모든 점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어떤 종류의 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지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은, 좋았습니다.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말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좋았죠. 그게 안 돼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만세를 몇 번 부르는 걸로 만족했습니다만.”


지훈은 노트에 그 순간의 감상을 몇 줄 써넣었다.

사실 규원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훈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장애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떤 타이밍에, 어느 정도 수위까지 해야 할 것인지. 지훈이 오늘 이 아틀리에에 온 것은 규원의 장애에 대해 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규원의 장애가 그의 작품 세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면 그 부분만을 피해 인터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다리, 원래는 멀쩡했습니다.”


그런 지훈의 마음을 읽었는지, 규원은 선수 치듯 그렇게 대답해 왔다. 지훈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아닙니다.”


규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사진 한 장 안 찍을 수는 없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야 그것도 제대로 된 인터뷰라고 할 수 없죠.”


규원은 휠체어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무릎에 팔꿈치를 얹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습니다. 오래된 집이었죠. 1층엔 부모님 방과 서재, 거실이 있었고 2층엔 저와 누나의 방이 있었어요. 나무로 된 계단이 있었는데, 기자님도 아실지 모르겠네요. 아주 짙은 갈색, 조금 자주색 비슷한 색깔도 나는 그런 나무로 된 계단인데요. 밟으면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났었죠. 누나가 그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계단 부서지겠다고, 돼지라고 놀려댔던 기억이 납니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규원의 눈빛이 흐려졌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잠시 그런 규원의 시선을 따라갔다.


“당시에 저는 그 계단의 층계참에 오래된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복도를 냅다 달려와서 풀쩍 뛰어서 그 매트리스 위로 떨어지는 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슈퍼맨! 하고 외치면서 말이죠.”
“아.”


지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눈 앞에 앉아있는 이 묘하게 차가운 남자에게도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일견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런 말씀 어떻게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도 굉장히 조용하게, 독서를 하시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의 저는 개구쟁이였습니다. 한 시도 조용히 앉아있질 못하고 온 집안과 온 동네를 싸돌아다녔죠. 지금 생각하니 그 몇 년 간, 평생 쓸 다리를 다 쓰라는 신의 뜻이셨나 싶기도 하고요.”


그 씁쓸한 말을, 그러나 규원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오래된 기도문을 읊듯 조용히 이어갔다.


“사내애들이란 그러면서 크게 마련이지만, 아무래도 부모님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번거로운 것도 사실이죠. 부모님은 제가 그렇게 소란을 피울 때마나 애꿎은 누나를 야단치셨어요. 누나는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저는 그 장난을 그만두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니 누나를 곯리는 게 재밌었던 거겠죠.”
“….”
“지금도 기억나요. 큰 눈이 온 다음날인지, 그랬습니다. 추운 날이었어요. 저는 그날도 그 장난을 하려고 2층 복도를 힘껏 달려서 있는 힘껏 층계참으로 뛰어내렸어요.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늘 뛰어내리던 그 지점보다 한 발 정도 앞에서, 뭔가가 발에 걸려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기 전까지는.”


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늘 뛰어내리던 한 발 앞에서 발이 걸렸다. 순간 머리 속에 잡히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정신을 잃었어요. 깨어나 보니, 3일인가가 지나 있었죠.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신경이 손상됐어요. 그 후로 1년 동안 별의 별 짓을 다해봤지만, 신경은 회복되지 않았고.”


규원은 반쯤 식은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누나에게서 사과를 받은 건 사고가 나고 반 년 쯤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매번 내가 뛰어다니는 일로 부모님이 누나를 야단치니까, 그게 화가 나서 그랬대요. 한 번 호되게 당하면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고무줄을 매놨던 거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더군요.”


대꾸할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지훈은 아아 인지 어우 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쓸 수 없는 애매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참만에야 지훈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것 참. 누님께 심각한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고요. 힘드셨겠네요.”
“누나는 그 때 열네 살이었습니다. 저보다 다섯 살이 많았죠. 중학교 1학년? 뭐 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애였죠.”


규원은 반쯤 남은 커피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그보다 더 어린애였다는 겁니다.”
“….”
“저는 누나에게 화를 냈습니다. 아니, 화를 냈다 라는 얌전한 말 한 마디 정도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악담을 퍼부어댔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다 나지 않아요. 아마 그 당시 제가 알던 모든 욕과 저주를 쏟아 부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규원이 입을 다문 순간, 서재 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기묘한 박력에 지훈마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까지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


지훈은 난처함을 이기지 못하고 노트 귀퉁이에 작은 동그라미를 몇 번 겹쳐 그렸다.


“그렇지만 그 당시엔 선생님도 많이 어리셨고, 본인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
“거기서 뭘 하고 있어.”


그러나 그 순간, 규원의 더없이 낮고 딱딱한 목소리는 지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반쯤 열린 서재의 문 뒤에는 커피 서버를 든 다니엘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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