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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3











다니엘은 지훈의 가방을 든 채 앞장서서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보는 아틀리에의 규모는 더 굉장했다. 아무리 봐도 이 건물의 본래 용도는 산속에 처박혀 호젓하게 그림이나 그리는 화가의 작업실 따위는 아닌 것 같았다. 고벽돌로 쌓은 벽은 다분히 고풍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 타일은 보기만 해도 발이 시렸다. 휑덩그레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의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필요 이상으로 커다랗게 느껴지는 유리창을 통해 정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거실이 나왔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내내 비싼 조각과 비싼 그림과 비싼 실내장식 같은 것이 가득해,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갤러리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선생님은 지금 작업 중이셔서. 커피라도?”
“네, 뭐 주시면.”


다니엘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입고 있던 코트를 대충 벗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부터도 느끼던 것이지만 그는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딘가 움츠러든 것처럼 느껴져 지훈을 갸웃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 점 하나만은, 확실히 다니엘은 의건과 달랐다. 매사 당당하다 못해 조금은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던 그와는.


“잠시 기다리세요.”


다니엘은 원두를 꺼내 그라인더에 갈기 시작했다. 커피콩이 분쇄되는 고소한 향이 거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익숙한 향기는 낯선 곳에 와 곤두선 신경을 조금은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향이 좋네요.”
“네. 선생님이 커피에 까다로우셔서 원두는 나름 좋은 것들만 갖다 놓거든요. 뭐 이건 선생님 원두가 아니고 제 거지만.”
“원두가 비서님 것 선생님 것 따로 있어요?”


별 생각 없는 질문이었으나 다니엘은 허를 찔린 듯 움찔 놀랐다. 그는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는 눈치라도 보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게, 선생님께서 아무래도 예술 하시는 분이시다 보니까 예민하셔서. 본인 물건 남이 손 대는 걸 좀 많이 싫어하시거든요. 손님한테 대접하는 거까지 뭐라고 하진 않으시겠지만, 아무래도.”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민한 사람이 남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는 경우는 흔하지만, 먹는 음식이나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한 것까지 예민하게 구는 정도가 그렇게 흔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크리스티에서 한국 화가 낙찰가 최고 기록을 갱신한 사람은 역시 다른 건가 하는 조금 삐딱한 생각도 없지 않아 들었다.


“나쁘게 생각하시진 마세요. 그냥 선생님이 워낙 정확하시고, 굉장히 규칙적인 분이시라.”


지훈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다니엘은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시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신 후에 아홉시부터 다섯 시까지 작업을 하세요. 그러고 난 후에 이른 저녁을 드시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다가 저녁 열한 시가 되면 주무시고요. 제가 선생님과 함께 지낸 지가 3년 가까이 돼 가는데, 그 규칙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으세요.”
“굉장하네요.”


지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저는 그 말씀하신 것 중에 한 가지도 못 지키는 것 같은데.”
“네, 사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하신다는 게 대단하죠.”


어째서일까, 마지막쯤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슬쩍 흔들린 듯이 느껴졌다.


“사실은 저도 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선생님보다 늦게 일어났다가 야단맞은 적이 많고요.”
“요즘 사람들 보통 그렇지 않나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기. 지훈도 그랬고, 의건도 그랬다. 별로 할 일이 없어도 웬지 빨리 잠드는 건 손해 보는 것 같다며 둘은 늘 새벽 늦게야 잠이 들었다. 가끔은 밤도 새벽도 아닌 아침에 가까운 시간에야 겨우 잠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고 난 다음날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점심시간 가까운 늦은 시간에야 잠에서 깼다.

그랬던 나날이, 있었다.


“네 그렇긴 한데 선생님은 그런 걸 굉장히 싫어하세요.”


다니엘은 웃었다. 새삼 느끼지만, 그는 웃는 얼굴이 보기 좋은 사람이었다. 의건이 그랬듯이.


“아무래도 제가 옆에서 챙겨드려야 되는 일들이 좀 있다 보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손님 붙잡고 너무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는 거 아냐?”


착 깔린 차가운 음성이 저 쪽 뒤편에서 들려왔다.

작고 느린 진동 모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보자, 휠체어에 한 남자 하나가 안에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다니엘은 벌떡 일어나 단걸음에 그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손을 저어 다니엘이 하려는 어떤 행동에 대한 거절의 뜻을 표했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다니엘의 앞을 지나쳐, 규원은 천천히 지훈이 앉아있는 소파 근처로 왔다.

그는 파리하다 싶을 만큼 흰 얼굴에 선이 가늘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어 키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다만 평균 체중에 비해 훨씬 마른 체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휠체어의 손잡이를 쥔 손은 살집이 없었고, 뼈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은 길쭉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나 지훈을 상대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웠다.


“윤규원이라고 합니다. 먼 길 오시게 해서 실례가 많습니다.”
“박지훈입니다. 저희야말로 인터뷰 제안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웃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기가 사라지고 탁자 위에 놓인 머그컵과 그에 담긴 커피를 바라보는 규원의 시선은 차가웠다.


“아, 저.”


멈칫멈칫, 규원의 시선을 따라가던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아직 작업하실 시간이라 커피라도 드시라고….”
“커피를 드릴 거면 커피나 드려야지, 왜 쓸데없는 말을.”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미소를 짓는 규원의 얼굴에서, 어째서인지 지훈은 오래 전 일본에 여행갔다가 본 가부키의 가면을 떠올렸다.


“우리 강 비서가 워낙 누구랑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가끔 저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훈은 엉겁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방금 다니엘이 한 말이 그렇게나 쓸데없는 말인지, 그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규원의 손짓에 따라 다니엘은 그의 휠체어를 밀어 거실에 면해 있는 서재로 이동했다. 다니엘은 커피 두 잔을 내 와 지훈과 규원의 앞에다 놓아주고는 인사를 꾸벅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한 모금을 마셔 보고, 지훈은 그 커피가 아까 자신과 밖에서 마시던 그 커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커피 어떠신가요? 제가 커피는 좀 까다롭게 마시는 편이라.”


규원은 물어왔다.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향이 좋네요. 그런데 제가 커피 맛을 미세하게 분간할 정도로 커피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아서요. 일전에 취재를 나갔다가 블루마운틴 중에서도 무슨 뱅크인가, 영국 왕실에 납품된다는 커피를 한 번 마셔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블루 마운틴 마비스 뱅크. 좋은 커피지요. 비싸고.”


규원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저는 비싼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비싼 커피 말고, 남들이 잘 모르는 커피를 좋아하죠.”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규원은 커피잔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이 커피는 르완다 커피입니다. 르완다 엔코로 슈프림이라고 하죠. 르완다에는 천 개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마다 각각 다른 향을 지닌 커피가 자란다고 하는데요, 유독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좋아합니다.”
“그렇군요.”


지훈은 천천히 인터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꼭 노트북을 꺼낸다거나 녹음기를 켠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인터뷰어로서의 자세이므로.


“아까 비서님 말씀이 하루 일정이 굉장히 규칙적이시라고 하시던데, 저희 인터뷰 때문에 일정이 틀어지시거나 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군요, 그 친구가.”


규원은 입 끝만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제 몸이 좀 불편하다 보니 라이프 사이클이 망가지기도 쉽거든요. 그래서 좀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다 싶을 만큼 일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으로는, 그 점이 다소 귀찮고 번거롭기도 하겠죠.”
“설마요.”


저도 모르게 지훈은 그렇게 대답했다.


“제가 비서님을 오래 뵌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럴 분으로 느껴지지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규원의 손가락이 커피잔의 손잡이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몇 번 두드렸다.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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