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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Everybody Lies 2











지훈이 기억하기로, 그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의건은 눈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는 정도였지만 난시가 약간 있어 멀리 떨어진 작은 글자를 보는 것은 조금 힘들어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콧등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있는 기분이라며 안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테가 얇은 동그란 안경은 그에게 꽤나 어울렸는데도.

그래서, 얇은 안경 렌즈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눈앞의 그는 의건처럼 키가 컸고,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흘끗 벌어진 코트 자락 안으로 짙은 회색의 스웨터와 빳빳한 재질의 옥스퍼드 셔츠 깃이 보였다. 제법 각이 지게 선이 꺾인 눈썹과, 살짝 끝이 내려간 눈꼬리 같은 것들. 안경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낯이 익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런 식의 ‘범생이’ 같은 차림은 의건의 취향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3년 전 두고 도망친 사람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그런 종류의 당혹감이 아니었다. 의건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도 아니었다.

뭘까. 아니, 누굴까.


“아, 저기. 혹시 성함이.”
“아.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명함이.”


허둥지둥, 코트 주머니 두 개와 바지 주머니 두 개, 뒷주머니까지를 뒤져서 명함지갑을 꺼내는 그의 부산한 손을, 지훈은 어쩐지 착잡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늦게 나와 죄송합니다.”


강다니엘.
손을 내밀어 받은 그 유독 빳빳한 명함에는 그런 이름이 박혀 있었다.

어쩐지 섭섭했다. 끝자리 숫자 하나만이 틀린 복권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강다니엘. 지훈은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그 낯선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강의건. 강다니엘. 성이 같다는 걸 제외하면, 그 두 이름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었다. 풀이 죽을 만큼.


“본명이에요?”
“아, 네. 본명이에요. 이름이 좀 연예인 이름 같죠.”


그는 격의 없이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힘이 빠졌다. 솔직히 납득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강의건이 아닌 강다니엘이라는 그의 말을 순순히 믿고 이대로 나가떨어져도 되는 것인지. 그러나 지금 눈 앞의 그에게 강다니엘은 무슨, 너 강의건 아니냐는 말을 해 본댔자 그는 그 말을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가방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아, 아니 별로 무겁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제가 들면 되겠네요.”


다니엘, 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지훈의 손에 들린 가방을 어렵지도 않게 빼앗아 들었다.










도시를 떠나온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식의 수가 현격히 줄어든다는 뜻이다. 인간의 도시에는 모든 것에 명찰이 붙어 있다. 건물의 이름, 번지수, 주소, 전화번호, 문패 혹은 간판. 그 모든 것들이, 바라보는 이가 어느 만큼의 위치에 서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도시가 삭막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얼마만큼 와 있는지를 실제보다 더 가혹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사방에 넘쳐나는 그 표식들의 탓도 일정 부분은 있는 것이다.

말이 아틀리에지 저택에 가까운 규원의 아틀리에는 제법 깊은 산 중에 있었다.

이름 같은 것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지훈은 했다. 서양의 저택들 중에는 무슨 관이니 무슨 장이니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아틀리에만 해도 그렇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세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도로를 벗어난 산길을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들어간 절벽 근처에 지어진 서양식 저택’이라고 일일이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순간 다니엘―솔직히 이 이름은 아직도 입에 붙지 않아 서먹했다―과 규원, 그리고 이 동네 인근에 사람들끼리는 이 아틀리에를 부르는 자기들만의 이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훈은 잠시 했다.

저택의 정면에는 장미 덩굴 모양으로 장식된 육중한 철문이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 놓은 것인지 문은 양 옆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를 통과해 지나가는 자동차 차창으로 지훈은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그 문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철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는 자동차로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한겨울을 향해 치달아가는 날씨는 여전히 차갑고 눈이 시렸다. 드문드문 낀 엷고 높은 구름 사이로 흐릿한 햇살이 드문드문 비치고 있는 풍경은, 이곳이 생전 처음 온 남의 아틀리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낯선 것이었다.


“다 왔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아틀리에 뒤로 뻗은 산 중턱에 군데군데 쌓여있는 잔설을 바라보았다. 2주쯤 전인가, 서울에는 눈 같지도 않은 첫 눈이 내렸다. 그러나 그 눈이 오다 만 것은 서울과 그 인근 뿐이었고, 서울을 벗어난 곳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녹지 않고 있는 잔설을 보니 정말 그런가, 싶기도 했다.


“강 비서님…이 운전하느라 고생하셨죠.”


강 비서라는 호칭이 있어서, 이름을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의건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부를 자신이, 아직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이런 마음은,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진짜 의건이냐 아니냐는 관계가 없는 문제 같기도 해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그리고.”


지훈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눈이든 비든 되게 많이 오면 여기 정말 고립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아닌 게 아니라 1년에 한두 번씩은 고립되죠.”


다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꼴로는 눈 때문에든 비 때문에든 한 번씩은 왕래가 끊겨요. 그래서 지하실에 늘 비상식량을 쌓아놓고 있고.”
“….”


딴에는 농담으로 던져 본 말이었는데 그런 대답을 들으니 그만 머쓱해져서 지훈은 잠시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지훈과 눈이 마주친 다니엘은 당황한 듯 다급하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니, 아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정도는 아니고요. 하루 이틀 정도 바깥이랑 왕래가 불편해지는 정도에요, 그냥. 그리고 집 안에서 어지간한 건 대충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안 좋은 날씨에 억지로 밖으로 나갈 필요가 별로 없다는 거고요.”
“추리소설 같은 데 나오는 외딴 저택 같네요.”


여기서 다니엘은 한 번 표가 나게 크게 멈칫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껏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요.”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확실해졌다. 그는 자훈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한 말투, 행동,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 지훈이 기억하는 의건은 이런 수수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얼굴이 같아도, 목소리가 같아도, 그런 것들이 일치하지 않는 그를 의건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기, 강 비서님.”


그러나, 그래도. 못내 미련이 남아서.


“혹시요.”


그가 그가 맞다면, 딱 하나만 물어보고 싶었다. 3년 전 그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두고 사라져 버린 데는,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건지.


“전에 어디서.”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랬던 건지.


“저 본 적 있지 않으세요?”
“네?”


그러나 다시금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3년 전 두고 도망친 사람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그런 종류의 당혹감이 아니었다. 의건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묻는 말에, 저런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을 만큼.


“어… 저를 전에 어디서 보셨어요?”
“….”
“죄송해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을 못해가지고. 어. 혹시 언제 어디서 어떤 자리였는지 그런 거라도 좀 말씀을 해주시면….”
“아녜요.”


더 이상의 이야기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일 것만 같았다.


“제가 아는 사람 하나하고 좀 많이 닮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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