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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춘풍추우春風秋雨 9

-무너진 왕조의 왕세자가 사는 법











춘풍추우春風秋雨
봄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비
지나간 세월歲月을 이르는 말









그날 오후, 왕실행정처에서 몇 가지 물품들이 민언궁으로 조달되었다. 몇 가지 지류 물품들과 의전용품들이었다. 행정궁관의 말로는, 자신이 이 곳으로 발령받은 후 행정처에서 이런 물품들이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지류물품들 중에는 편지지 몇 세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몇 대를 거듭해 내려온 제지가 가문에서 만들어 납품하고 있는 것으로, 수제 종이에 직접 짠 염료로 염색을 하고 희귀한 야생화들로 만든 압화를 붙여 만든 고급품이었다. 다니엘 또한 전선에 있을 때 이와 비슷한 편지지에 적힌 장문의 위문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보낸 사람은 유원공주였다.


“편선지가 좀 남는군요.”
“그렇습니까.”
“뭐 흔히 있는 일이죠. 내려온 물목보다 실제의 수량이 조금 남는 거요. 일종의 위문품 비슷한 거랄까요.”


그녀는 몇 세트 정도 남는 편지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한 세트를 다니엘에게 건넸다.


“피앙세한테 안부 편지라도 보내세요.”
“아니, 저는.”


피앙세 같은 건 없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녀는 그 말을 다르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편선지 이까짓 것 뭐 별 것은 아닌데, 그래도 왕실 사람들만 쓰는 물건이니까요. 아마 받고 좋아하실 거예요.”


그녀 나름으로는 다니엘에 대한 배려였다. 끝까지 사양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다. 다니엘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녀가 내미는 편지지를 받아들었다.

안부씩이나 전하는 것이 객쩍은 후방으로 발령이 난 것도 그렇다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좋을지 알 수 없는 편지이나마 보낼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니엘과 그의 부모는 안부편지씩이나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건강하게만 자라 집안의 가업인 소목장(小木匠) 일을 이어받기를 원했던 아버지와 다니엘은 다니엘이 머리가 굵어진 이후 거의 매일 부딪혔다. 다니엘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기어이 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는 노여운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네놈에게 부모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모양이니 나 또한 그리 알고 살련다는 말을 했고 다니엘 또한 지지 않고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는 바라고 말대꾸를 했다. 한참이나 나이를 먹고 생각하니 그것이 노여운 기색이라기보다는 서운한 기색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 부자간의 정리에는 너무나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전선으로 떠난 지 2년여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다니엘은 집에 단 두 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런 부모님에게 새삼스레 편지를 내어 구구절절한 안부를 전한다는 것도 일견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니엘은 도톰한 편지지를 손끝으로 감촉해 보았다. 이 미친 전쟁의 한 가운데 떨어져, 내가 여기 무사하다는 말을 전할 사람조차 없는 인생이란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일견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가 내키지 않는다면, 어머니에게라면 조금 나을까.

행정궁관이 손에 떠안긴 그 편지지는 다니엘에게 예상치 못한 번뇌를 안겨 주었다. 대놓고 펜을 들 엄두는 나지 않아, 다니엘은 책상에 놓인 편지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책상 서랍에나 집어넣어버릴까 하던 참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안으로 들어온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은 반사적으로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궁의 태자 전하께서….”


그러나 뭐라고 말을 하려던 지훈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다니엘의 책상에 놓인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지훈의 시선을 따라 제 책상 위로 눈을 돌렸던 다니엘은 지훈이 미처 묻기 전에 그가 궁금해 할 법한 대답을 미리 꺼냈다.


“오늘 몇 가지 지류품이 들어왔습니다. 한 세트 정도는, 소관에게도 돌아온 모양인지라.”
“그러하군.”


지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귀관에게도 안부를 전할 가족이 있구나 하던 생각을 하던 참이었네.”
“가족이야 있습니다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다니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시겠습니까? 행정궁관의 말로는 민언궁에 지류품이 조달된 것이 꽤나 오랜만의 일이라 하니 전하께서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으실 터인데.”


내 나라도 아닌 나라의 왕실 지류품 따위를 내가 봐서 무엇하느냐는 둥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듯도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지훈은 순순히 손을 내밀어 다니엘이 건네주는 편지지를 받았다. 조금 전 다니엘이 그러했듯 손 끝으로 종이의 질감을 감촉해 보는 그의 모습을, 다니엘은 다소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카디 페이퍼(Khadi Paper)인가.”
“글쎄요.”


다니엘은 잠시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이 종이의 이름이 정말로 카디 페이퍼인지 아닌지 그것과는 관계없이, 지훈에게서 그 말을 들은 것 자체가 그에게는 사소한 놀라움이었다.


“소관은 일개 군인일 뿐이라, 왕실 편지지가 어떤 종이로 만들어지는지까지는 잘 알지 못하여.”
“예전, 어마마마께서 살아계실 때.”


그 말은, 지금은 살아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손수 글씨를 쓰고 색을 칠하여, 합지를 하고 실로 매어서 동화책을 만들어 주신 일이 있으셨는데 그 종이가 꼭 이와 같아 잠시 반가웠네.”


다니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손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준 동화책이라니. 그런 호사한 것은, 물론 다니엘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묵한 아버지를 도와 공방의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했고 가구를 주문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들이 읽을 동화책 따위를 만들어 줄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지금의 그 몇 마디 말로, 다니엘은 지훈의 기억 속 가장 부드러운 한 부분을 슬쩍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안부편지라도 하는 것이 어떠한가.”


지훈은 다니엘에게 편지지를 돌려주었다.


“명색 왕실에서나 쓰는 편선지라 하니, 그 편지를 받는 귀관의 가족에게는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전하야말로, 지류품이 새로 들어왔으니 본국에 서신이라도 한 장 보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국왕 전하 내외분께서 아우를 이 곳에 보내고 많은 걱정을 하시고 계실 듯 한데.”


순간 지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사라졌던 냉막한 표정이, 호수 위에 끼는 물안개처럼 그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서신 따위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지훈은 돌아섰다.


“서신 따위를 쓰는 시간을 주는 것보다 합의문이나 빨리 초해주는 것이 내게는 더 기꺼운 일일 텐데.”


돌아서는 그 뒷모습은 다니엘이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조그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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