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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9











『명을랑은 주시려면 옛날옛적 삼천갑자 동방삭의 기나긴 명을 점지를 하시고
복을랑은 주시려거든 왕개석순에 복을 주리 만복은 받았거니와』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의건은 동리 사람들에게 물어, 지훈을 시내 병원에 며칠 입원시켰다.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열에 들떠 앓은 탓에 지훈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수액을 맞고, 한 이틀 있다가 퇴원하라는 말을 하려는 의사에게, 의건은 이 아이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는 저를 낳자마자 죽은 참에 어머니 대신 저를 키운 할머니마저 며칠 전 세상을 떠나 상을 치러야 하는 참이라고 말했다. 조그만 것이, 딱하게도. 초로의 의사는 한참이나 혀를 차더니 그러면 상을 다 치를 때까지 입원 시키는 것으로 합시다, 하고 제 편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지훈이 퇴원을 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화의 시신은 이미 발인까지 마치고, 감쪽같이 인근 공원묘지에 매장까지 해 버리고 난 후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조모 유화의 신상에 무슨 일인가가 생겼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어 아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지훈은 단 한 번도 의건에게 할머니는 어디 갔는지, 왜 갔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따위를 묻지 않았다. 집에서 유화가 쓰던 물건이 거의 모두 사라졌는데도, 심지어는 그 유화의 방을 의건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거 참, 꼬맹이 주제에 벌써부터 어른을 신경 쓰이게 할 줄 아는 녀석이라고 의건은 생각했다.










지훈은 의건을 ‘형’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은 여러 가지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차라리 ‘아저씨’ 쪽이 속이 편할 것 같았지만, 지훈은 부득부득 의건을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게, 현생의 얼굴이 너무 동안인 것이 문제인가, 하고 속편하게 생각하다가도 어쩐지 속이 뒤숭숭해져 의건은 저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리에 몇 있는 지훈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하나 빠짐없이 의건을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오지랖 넓은 동리 사람들의 입방아였다. 유화의 부름을 받고 집에 왔을 때 지훈을 보고 있던 동리 아낙에게 윤희의 재종아우라고 말해 버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지훈의 어머니인 윤희와 재종남매간이라면 그 아들인 지훈에게 의건은 엄연한 재종숙 뻘이 되었다. 어디, 숙부 뻘을 형이라고 부르는 법이 있냐고 남의 일에 입 대기 좋아하는 동리 노인들은 지훈이 의건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눈에 띌 때마다 지훈을 타박했다. 그러면 의건은 으레 그 앞을 막아서며, 애가 이렇게 어린데 형이니 숙부니 그런 걸 벌써 가르치면 알아듣겠느냐고 웃으며 변명했다. 요즘 세상에 7촌이믄, 그게 남이지요 뭘. 그래도 사람 사는 법도가 그런 게 아니라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말을 늘어놓기 전에, 지훈의 손목을 붙들고 얼른 돌아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형이라고 부르면, 안 돼?”


의건의 손에 이끌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며, 지훈은 어느 날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


의건은 저만치 앞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니 마음대로 하믄 된다.”
“근데 맨날 혼나니까.”
“원래 사람이 나이 들믄, 쓸데없이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는 낙으로 사는 거다. 신경 쓰지 마라.”
“근데.”


지훈은 고개를 들고 빤히 의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잖아.”
“뭐가.”
“아니잖아. 친척.”


질러 묻는 아이의 목소리는 결곡했다. 저라서 뜨끔 놀라, 의건은 문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그리고, 되레 의건의 손을 잡아끄는 지훈의 손에 이끌려 다시 걸음을 떼었다. 끌려라도 가듯이.


“그래서 그냥 형이라고 부르는 건데.”


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7촌이라는 촌수는 그러니까, 네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가 사촌지간이었다는 이야기니 요즘 세상에는 남이나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둥의 말을 잔뜩 되씹던 의건은 되레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맞나.”


의건은 떨떠름하게 그렇게 대꾸했다.


“뭐 남이나 그래 크게 다름없는 사이기는 하다.”
“남이랑 다름없는 게 아니고, 남 맞잖아.”


의건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지훈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그렇게 되물어왔다.


“아니야?”


이래서, 애는 애라고 의건은 생각했다.

이 녀석이 다섯 살만 많았더라도, 방금의 그 남이나 크게 다름없다는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애라서, 그렇다 아니다 하는 명확한 답을 이런 식으로 요구해 오는 것일 터였다. 의건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말렸지만, 아직 그 앞에서 담배까지 함부로 꺼내 물고 싶지는 않았다.


“비밀이다.”
“응?”
“비밀이라고. 니랑 내랑 친척 아닌 거.”


도리 없었다. 의건은 짤막하게 내뱉고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


“니랑 내랑 아무 사이도 아니믄, 니 지금 그 집에서 못 산다.”
“….”
“피 몇 방울이나 섞였을지 모르는 7촌간이나마 된다 하니까, 내가 니 데리고 살아도 아무도 말 안하는 거다.”
“….”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훈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 의건은 한참이나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지훈의 동그랗고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니까.”


지훈의 대답은 한참만에야, 아주 천천히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지훈의 입에서 유화가 들먹여지는 순간, 의건은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죽은 거네.”
“….”
“괜찮아. 벌써 알고 있었으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조금의 물기도 없었다.


“어쩌면 있지. 다행일지도 몰라.”
“뭐가.”
“내가 싫어서, 귀찮아져서, 할머니가 도망가 버린 게 아니라서.”
“….”
“내가 그렇게까지 귀찮은 애가 아니어서.”


도대체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냐고 버럭 목청을 높일 뻔 하다가, 짐짓 심란해져 의건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지훈의 손을 놓고는 담배 한 대를 빼물었다. 의건이 제 손을 놓았는데도 지훈은 의건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다시 의건의 손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할 말 다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의건의 걸음을 따라 타박타박 걸을 뿐이었다.

거 참, 꼬맹이 주제에 벌써부터 어른을 신경 쓰이게 할 줄 아는 녀석이라고 의건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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