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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6











『시방정토 극락세계 삼십육만은 일십일만 구천구백 동명 부모 자비 대비 아둥 도산 금상에도 여래신데
무량서기 불명 불에 만 보살이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사내, 의건은 혼자 산을 내려왔다.

유화의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제 한 목숨을 이 자리에서 끊어, 그 댓가로 의건을 육화해 현실에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천신의 몸으로 인세에서 살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해가 뜬 낮에는 다닐 수 없다든지, 그림자가 없다거나,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거나, 기척이 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유화는 제 한 목숨을 끊어, 그 모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인세에 머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각오는 장하기는 했지만 그지없이 부질없기도 한 것이었다.

제 속으로 난 제 자식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인세를 벗어난 천신의 몸으로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먹는 사내 아이 따위를 맡아 무엇을 어찌해 달라는 속셈인지, 의건은 알지 못했다. 몰려드는 귓것들로부터 그 몸 지켜달라는 부탁이라면, 막말로 그 아이가 신내림만 받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야긴가. 신내림을 받지 않고도, 인간의 팔자가 사나워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훈의 어미인 윤희만 해도 그랬다. 열 달 품은 핏덩이를 세상에 내놓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한창 때 장정도 쉽게는 못 오르는 뒷산 당산나무까지나 올라가 목을 매달게 만든 것은 귓것의 소행이 아니었다. 사람의 짓이었다. 인간으로서 살아보지 못한 자신이 그런 것들을 어디까지 막아줄 수 있을지, 그것은 의건도 몰랐다.

인간의 망집이란, 본래가 그런 것이었다.










이 길을 다시 걷는 것은 대략 3년 정도 만이었다.

소슬한 시골의 길은 변하지도 않았고, 바뀌지도 않았다. 그리고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의건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곳에 이러고 살고 있는 한, 그 아이의 팔자라는 건 바뀌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뻔하디뻔한 곳에 살아서야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살이 그 길을 잃어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부터가 무리일 테니까.

어제 온 듯 익숙한 길을 디뎌, 의건은 유화의 집으로 갔다. 잠겨 있지도 않은 대문을 밀어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펴고 누운 지훈의 곁에는, 나이 든 아낙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입을 떼자 아낙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눈가로 주름이 진 눈을 몇 번이나 꿈벅거리며, 그녀는 눈 앞에 버티고 선 훤칠한 젊은 사내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뉘시오?”
“아, 저는.”


유화에게서 들은 귀띔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쓸만한 변명거리 하나쯤은, 천신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윤희 누나가, 저희 재종 누이 뻘이 됩니다.”


윤희, 그리고, 누나.

의건이 처음 본 윤희는, 저기 이불 속에 파묻힌 채 해쓱하게 질린 지훈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리고 그 때도, 의건은 꼭 지금 정도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자라서, 소녀가 되고 숙녀가 되는 모습을 의건은 전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런 윤희를 두고 ‘누나’라는 헤먹은 호칭을 입에 올리는 마음은, 아무리 눈 앞의 사람을 속이기 위함이라지만, 썼다.


“그렇구먼.”


막히지도 않고 술술 하는 대답에, 재종간이라는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촌수 덕분에 이 아낙은 순식간에 의건에 대한 의심을 말끔히 풀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윤희하고 재종간이면, 당골네하고는.”
“숙모님 뻘 되십니다.”


의건은 말 한 번 더듬지 않고, 매끄럽게 대답했다. 요행히, 이 아낙은 아직까지 흐릿한 형광등 아래 마주 선 사내의 발밑에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까지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훈이가 몸이 좀 안 좋고, 저희 숙모님도 뭐, 연세가 연세신지라.”


요즘 세상이 흉하여, 일면식도 없는 남이 친척인 듯, 지인인 듯 숨어들어 이런 저런 나쁜 꾀를 내는 일도 많다고는 하지만 이 집 주인의 이름과, 벌써 10년도 전에 죽은 딸의 이름과, 그 아들의 이름까지를 모두 알고 있는 낯선 사람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아낙이 생각해 버린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집에 하나는 안 있어야 되겠나, 해서.”
“그렇지.”


아낙은 거듭거듭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네.”
“밤 늦었습니다. 인제 그만 가 보셔야지요.”


의건은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아낙에게 이제 애 볼 사람도 왔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몇 번이고 돌려서 던졌다.


“안 그래도 숙모님이, 이웃 아주머니 잠도 못 주무시고 와 계시다고, 얼른 좀 온나고 하도 성화를 하셔서.”










그렇게, 이웃집 아낙을 떠밀 듯 집으로 돌려보내고 의건은 지훈의 곁에 좌정하고 앉았다.

죽은 듯 잠든 아이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이미 며칠이나 앓은 듯싶었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 먹은 생떼같은 딸을 비명에 잃고 키우고 있는 손자인 것은, 의건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런 모진 부탁을 할 염도 먹었던 것이겠거니 하고 의건은 생각했다.


“이 사람,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이네.”


둘러본 집 안은 잡다한 귓것의 흔적으로 이미 어지러웠다.

젊은 날의 유화는 꽤나 신령한 만신이었다. 쉬운 말로 천신이니 만신이니 하는 신들 중에서도 어지간한 축들은 유화를 당해내지 못해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그녀에게라면, 만신의 신당이나 다름없는 집안에 이런 귓것의 흔적이 너저분한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신력도 어두워져, 제 코앞까지 이런 잡스러운 것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 금쪽 같은 손자에게 이런 일이 생기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의건은 짐짓 목을 돋우어 헛기침을 했다.

짐짓, 술렁거리던 집안의 공기가 잦아들었다. 청하지 않은 잡스러운 귀들 사이에 엄연한 천신이 나린 것이니 저라서 몸을 사리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뚜렷하게 잡히는 귀기가 있었다. 보통 무격의 피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흔하지 않게는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모계를 따라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내아이인 지훈이 그 피를 물려받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런 지훈을 찾아온 몸주신이 있다면 생판 모르는 남일 리는 없었다.

의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서라. 면상이나 보게.”


저기, 지훈의 발치 언저리. 희뿌옇게 엉기는 귀기는, 제대로 된 천신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떠돌고 있던 원혼인 듯도 하고.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


꾸짖는 의건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인제 겨우 열 살 먹는 애한테.”


그러나 의건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의건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그의 눈은, 모기향 연기가 엉기듯 희뿌옇게 엉킨 공간 너머에 서 있는 무언가에 못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속에 든 것은 의건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니, 설마.”


보통 무격의 피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흔하지 않게는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모계를 따라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내아이인 지훈이 그 피를 물려받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런 지훈을 찾아온 몸주신이 있다면 생판 모르는 남일 리는 없었다.


“윤희더나.”


그 곳에 서 있는 것은, 7년 전 지훈을 낳고 당산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지훈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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