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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5











『밤이 되면 불이 밝고 낮이 되면은 물 맑아 물불은 상극인데 어르사속경 고명같소
옥쟁반 금쟁반 순금쟁반에 진주를 굴린듯 얼음 위에도 백로같소』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다음날 밤, 유화는 인근의 아낙에게 지훈을 맡기고 산에 올랐다.

애가 아프다는데 애를 집에 혼자 놔두고 어딜 가냐던 아낙의 말은 유화의 손에 들린 요령이며 온갖 무구(巫具)를 보고는 자른 듯이 멈추었다. 어여 가소. 훈이는 내가 잘 보고 있을라니까. 유화는 메마른 얼굴로 사례를 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이 제대로 된 웃는 얼굴이었을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유화가 간 곳은 지훈이 발견된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였다.

그 곳에 자리를 깔고 제상을 차린 후, 유화는 실로 오랜만에 초혼굿을 했다.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된 지가 올해로 어림잡아 40년 남짓, 이제는 굿의 신명을 타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아 번번히 힘에 부쳤다. 사설을 치는 목소리는 갈래갈래 갈라졌고 무복 아래 선뜻한 바람이 들어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 굿으로 부르고자 하는 자가 그렇게나 간절하지만 않다면, 벌써 한참 전에 걷어치웠어야 할 망한 굿판이었다.


“뭔 일인데.”


등 뒤에서, 착 가라앉은 장부의 음성이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유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 온 것은 유화가 그리도 기를 쓰고 부르려 했던 그 자였다. 이 자를 처음 본 것이 대충만 헤아려도 20년 전, 그 때도 그는 꼭 이런 얼굴이었다. 사람이라면 벌써 20년의 세월을 맞아 어린아이라면 청년이 되었어야 옳고 청년이라면 중년이 되었어야 마땅하겠으나, 그는 그 세월 위를 한 발 뜬 것처럼 그 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셨는가.”


서름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헤먹었다.


“게 좀 앉소.”


천천히 도사려 앉는 무릎에서 삐그덕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게, 이렇게나 용을 쓴 굿은 몇 년 만인지 이젠 얼른 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넋두리가 나오려는 것을 유화는 지그시 입 속의 살을 물고 참았다.


“아니지?”


유화는 대뜸, 제 자리를 잡고 앉은 사내에게 물었다.

행여나 했다. 그러나 이렇듯 얼굴을 보고 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 어린 것을 여기까지 꾀어 와서, 맨손으로 나무 등걸 아래를 파헤치게 만든 것은 여기 이 자가 아니었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뭐가.”


되묻는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훈이가.”


이 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는 것이 3년 만이던지, 하고 유화는 생각했다. 지훈이 산에 올라갔다가 알 수 없는 귓것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바위 아래 떨어져 혼절해 있는 것을 집까지 업고 들어온 것이 다름 아닌 이 사내였다. 그 날도, 지훈을 살렸다는 고마움보다 두 번도 보고 싶지 않다는 꺼려짐이 더욱 커서 찬 물 한 잔 주지 않고 내어 쫓았다. 그 일이 대번 마음에 걸렸다.


“신병(神病)이 든 것 같소.”
“….”
“혹시나 천신님이 한 짓인가 하였으나.”


그 말에, 사내는 쓰게 웃었다.

유화가 사내를 처음 본 것은 딸 윤희가 이름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가 요령을 들고 사설을 뱉어내던 그 다음 날이었다. 날을 새워 굿을 하고 기도를 올린 끝에, 유화는 제 딸의 몸주로 붙을 뻔한 천신님과 직접 닿을 수가 있었다. 차라리 이 쓸모없는 것을 두 번 세 번 데려가시고 저 어리고 가엾은 것은 제 팔자 놓인 대로 사람으로 살게 하시라 울면서 빌었다.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된다더나.

긴 손가락 끝으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천신은 그렇게 말했었다.

사람이 어째 나서 어째 죽는가 하는 거는 전부 하늘님이 마련하시는 거라, 내가 몸주가 안되더라도, 언제고 이런 일은 또 있을 건데.
두 번 오면 두 번 빌고, 세 번 오면 세 번 빌지.

그래도, 그렇게밖에 답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백 번 오면 백 번 빌고, 천 번 오면 천 번 빌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신은 물러갔다. 귀신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만큼 쉽게야 바뀔까만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 길로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만 챙겨 황황히 윤희를 도시의 친척집에 떠넘기듯 보냈다. 거기서 부엌데기가 되더라도, 다락방에 숨어 식은밥이나 먹으며 연명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귀신에 제 명을 저당 잡히고 제 것 아닌 신명에 널뛰는 생을 살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낸 목숨은 고작 스물다섯 해를 겨우 살고, 저를 꼭 닮은 사내아이 하나 남겨놓은 채 당산나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무당이 될 뻔 했던 여자의 어미와 그 여자의 몸주신이 될 뻔 했던 천신은 여기 이 자리에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섰다.


“그 대답 한 마디 듣자고 이래 거창한 판을 벌리나.”


사내의 음성에는 역정이 배어 있었다.


“노부도 인제 대문 밖 한 발 잘못 디디믄 그 길로 저승 아니가.”
“그렇지.”


유화는 말없이 한참을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불렀소.”
“뭔 소리고.”
“내 나이가, 이제 환갑이 지났소.”


도대체 무얼 하느라, 나이만 이리 먹었는가 유화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산다면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몇 년을 더 살아서, 내가 과연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고대광실 좋은 집에,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도 슬슬 눈 앞에 저승차사가 오락가락 할 나이인데, 열다섯에 신 받아 일평생을 진 데 마른 데 안 가리고 디뎠으니 어찌 이 목숨 오래 갈까.”
“….”
“해서, 내가 부탁이 있소.”


유화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훈이, 그 어린 것 좀 잘 봐주시오.”
“땅에 발 못 딛는 내가 뭐를 얼마나 해 줄 수가.”
“그래서 이리로 모신 게요.”


유화는 고개를 돌려 제가 등지고 앉은 당산나무를 바라보았다. 윤희가 목을 맨 가지는, 몇 년 전 태풍이 왔을 때 부러져 나가 지금은 옹이가 져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을 살아온 당산나무는 여전히 실했고, 사람 하나가 목을 맬 만한 가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다 늙은 목숨이나마 사르면.”
“….”
“내 천신님의 그림자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을 성 싶어.”


지그시 찡그려지는 얼굴을 보다가, 유화는 한 마디 더 했다.


“당장 그 어린 것이 무병이 들어, 어제 제 어미가 목매 죽은 이 나무 아래에서 눈을 까뒤집고 자빠져 있는 꼴을 보니, 내 예서 더 살아 무슨 좋은 꼴을 보겠는지 싶고.”


사내의 짙은 눈썹이 삐끗, 움직였다.


“그러니까, 노부의 말은 지금 내를 더러.”
“이 년이 다 된 것은 목숨 뿐만이 아니네.”
“….”
“20년 전 그 때는 딸년 목숨 하나 구하겠다고 패악 부릴 기갈이라도 남아 있었다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눈먼 몸주가 계집애도 아닌 사내애에게 들러붙은 건지 내 그것조차도 이제는 알기가 어렵네. 이런 내가, 뭘 어떻게 더 할 수 있겠소.”


사람도 걱정이고 귀신도 걱정이었다. 귀신도 걱정이고 사람도 걱정이었다. 내가 도대체 몇 년이나 더 이승에 남아 저 어린 것을 지킬 수 있을지, 유화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제 어미가 겪은 것 같은 흉한 꼴을 저것이 또 겪으리라 생각하면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제가 먼저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대저 천신님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기자(祈子) 또한 백사장의 모래알만큼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연이 닿아 몸주신과 제자로 만날 뻔 하였으면, 그 어찌 가벼운 인연이라 하겠소. 그러니.”


젊은 사내의 외양을 한 천신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는 유화의 손 끝을 떨리고 있었다.


“천신님이 그 딱한 것을, 부디 굽어살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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