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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4











『삼천갑자 동방석에 명을 빌고 복을 빌어 선팔십 후팔십 일백은 육십세라
강태공에도 날을 빌어 석순에 복을 받아 오복을 골고루나 정칠팔월 비실적에
딸을 나면 효녀 낳고 아들 나면 효자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지훈에게 ‘손님마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3년쯤 후의 일이었다.

그 날도 지훈은 멀쩡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오전에 있던 체육 수업도 잘 받았다. 그날의 수업 내용은 뜀틀 넘기였는데, 제법이나 몸이 날랜 지훈은 네 단까지도 무사히 뛰어넘었다. 다섯 단까지도 넘을 수 있었지만 손을 짚는 위치가 좋지 않아 엉덩이가 뜀틀 끄트머리에 살짝 걸렸다. 그러나 그렇게 따져도, 다섯 단을 무사히 뛰어넘은 아이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으니 반에서 제일 잘한 축에 속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급작스레 한기가 들었다. 어린 몸을 엄습하는 한기를 이기다 못해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렸다. 어찌나 용을 썼는지 나중에는 어깨며 온 몸이 뻐근하게 쑤셨다. 그렇게 겨우겨우 수업을 마쳤으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에 겨워 지훈은 책상에 이마를 댄 채 한참이나 끙끙 앓았다.

지훈이 가방을 메고, 절듯이 교실을 빠져나온 것은 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도 30분이나 지난 후였다.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열자마자, 지훈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처음에는 감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수두거나, 홍역이거나, 기타 어린애가 앓을 만한 그렇고 그런 병증이겠거니,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심지어 조모인 유화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르고 여윈 손등으로 불덩이처럼 열이 나는 이마며 뺨을 다려 보고, 약국에서 어린이용 해열제와 감기약을 사다 먹였다. 이불을 목 위까지 꼭꼭 여며 덮어주고는 땀 푹 내고 하룻밤 자면 나으려니, 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나 지훈의 병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지훈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도 안 되어 얼음주머니를 대어놓아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들뜬 눈은 뿌옇게 흐려졌고, 이제는 숫제 팔을 허공에 내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일이 예사 일이 아닌 것을 안 유화는 지훈을 업고 동네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응급실에서, 유화는 지훈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만을 들었다. 심지어 체온조차 정상 범위를 크게는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 눈깔이 있으면 직접 보라고, 애가 이렇게 눈을 까뒤집고 넘어가는데, 이 뺨따구에 핀 이게 다 열꽃이 아니면 무어냐고 언성을 높였으나 소용없었다. 병원에 있는 모든 체온계를 가져와 다 체온을 재었으나 지훈의 체온은 37도가 채 되지 않았다.

약국에서 사다 먹은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해열제 한 봉지를 처방받아 손에 들고 지훈을 업고 집으로 돌아가며, 유화는 연신 미끄러지려는 손자의 몸을 치켜 업으며 목을 놓아 울었다. 이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병증의 원인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유화는 지훈을 자리에 눕히고 물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 주었다.

어린 지훈의 몸에는 전신에 열꽃이 피어 울긋불긋했다. 앓는 입술은 허옇게 말라 있었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처롭게 손을 내저으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엉망으로 뭉개진 그 목소리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냐.”


유화는 손등으로 짓무른 눈가를 훔쳐 내고는, 지훈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할미 여기 있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어린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째서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그녀의 딸이었고 지훈의 어머니였던 윤희도, 꼭 이만할 무렵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열흘이 넘게 앓았다.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다가 몰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해 깜빡 존 사이, 귀신에 이끌리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윤희는 벽장 깊은 곳에 숨겨둔 요령을 꺼내 들고는 평생 무당질을 해 온 자신도 처음 듣는 사설을 뱉으며 공수를 하고 있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그를 앞서 섬뜩해서,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그제야 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는 픽 쓰러지는 어린 것을 붙들어 안고 천신님네 만신님네 어찌 그리 야박하고 어찌 그리 욕심 많아 이 년 한 몸 드센 팔자로 만족치를 못하시고 이 어린 것에게까지 제자로 살라 하시느냐 밤을 새워 울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이 드센 놈의 팔자를, 저 어린 것에게까지 물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바탕 신명을 풀고 나니 조금은 정신이 든 어린 것의 손에 옷보따리를 들려 도회지 사는 친척의 손에 떠밀어 보내는 마음은 쓰렸다. 전화도 하지 말고, 기별도 하지 말고, 네 앞길 네가 가려 잘 살라는 모진 말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어린 딸의 손목을 잡은 친척 아재의 뒷모습이 저만치 사라지고 난 후에야 유화는 마음을 놓고, 단장(斷腸)하는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아이에게 든 것도, 그 병이라면.

무당의 자손은 무당으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들이라서, 사내아이라서 조금은 안심을 하고 있었다. 윤희가 그리된 것은 계집이라서 그런 것이거니 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휘둥그레 크고 예뻐서, 그 예쁘장한 것이 할미인 제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신님 만신님 눈에도 그런 것이라서, 저 몸이 탐이 난 어느 눈 먼 몸주가 붙은 것인가.

유화는 겨우 붙든 지훈의 손등을 토닥였다. 일단 지훈이 잠들기를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유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지훈이 누웠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축축하게 땀 흘린 자국이 남은 이부자리만이 걷어치워져 있었다. 화들짝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마루 아래에는 지훈의 운동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신도 신지 않고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여 집안 곳곳을 뒤지고, 마루 아래며 문갑 위며 온갖 곳을 뒤졌으나 지훈은 없었다. 눈이 뒤집힌 유화는 그 길로 이장의 집 문을 두들겼다. 자려고 누웠던 이장과 그 아내, 그 아들 둘이 황황히 옷을 주워 입고 뛰어나왔다. 마을 인근을 다 뒤졌으나 지훈은 간 곳을 몰랐다.

그날 밤을 꼬박 새고, 희뿌옇게 해가 뜰 무렵에야 유화는 지훈을 찾았다. 지훈이 발견된 곳은 제 어미가 목을 매어 죽은 뒷산의 당산나무 아래였다. 도대체 무엇에 홀렸던 것인지, 고사리 같은 어린 손으로 나무 등걸이 묻힌 땅을 파헤쳐 손톱이 부러지고 살이 까져 피가 나고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일 뿐, 희게 까뒤집은 눈이며 입술 가득 문 거품이 어디로 보나 멀쩡한 행색은 아니었다.

어린 것이, 어쩌다가 어른도 오기 힘든 이런 곳까지 왔노, 하고 이장은 혀를 찼다. 유화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밤새 흘린 눈물에 짓무른 그녀의 눈은 당산나무에 걸린 색이 바래고 낡은 오방기 천 조각들을 물끄러미 훑고 있었다.

이 어린 것을.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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