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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2











『몽중살은 직송살이요 살풀어서 내릴 살 원근도중에 이별살이요
부모 돌아가 몽상살 몽상입어 거상살이요 거상벗으니 탈생이라』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지훈의 꿈 속은, 본디부터 평온하거나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을 무어라 하는지는 몰라도 잠이 들면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안 후, 지훈은 내내 산란한 꿈에 시달렸다. 그 꿈은 때로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이기도 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뜨지 않는 밤이기도 했다. 먼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더러더러 들려오는 깔깔대는 웃음소리이기도 했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죄다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어떠한 한 장면이기도 했다.

그날 밤에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 지훈은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가 제 어린 귀에 바싹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무어라고, 끝없이 중얼거리던 것이 토막토막 기억날 뿐이었다. 그것은 더러는 어린 지훈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이기도 했고, 지훈의 나이와는 관계없이 그 뜻을 새길 수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닌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는지 앓는지 모르고 누웠다가, 지훈은 뺨이라도 꼬집힌 듯 번쩍 눈을 떴다.

어린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저도 모르게 손등을 들어 훔친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지훈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를 벤 것은 이름 모를 약초 냄새가 밴 광목 베갯잇, 몸을 덮은 것은 이태 전 새로 산 누비이불이었다. 한 뼘 남짓 열린 문틈으로 흐릿하게 새어드는 불빛에, 벽 쪽에 놓인 자개장의 학 모양 장식이 이상하리만큼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낯익다 못해 지겨워, 지훈은 그제야 제가 집으로 돌아와 조모의 방에 누운 것을 알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일단 일어나 앉으려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르게 온 몸이 다 쑤시고 아팠다. 뭐가 이런지, 왜 이런지를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여느 때처럼 혼자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 풀에 심통이 나 그만하였고, 그랬더니 마치 저 혼자 낸 골을 받아낸 사람이 있기라도 했던 듯 돌멩이가 날아오던 것까지가 기억났다, 그 때아닌 돌멩이들을 피하려다가, 그만 바위 아래로 떨어졌던 것 같다. 발을 헛디디던 그 아찔한 감각에, 목덜미로 새로운 식은땀이 배어올랐다.

분명 그랬었는데.
나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돌아가.”


열린 문 틈으로, 조모의 음성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일이야 이쯤 해두려니와, 예가 네가 올 곳이 아님은,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터.”


조모는 무당이었다. 무당이 무엇인지 잘은 몰랐지만, 조모가 말을 건네는 상대가 사람이 아닐 때도 간혹 있다는 것을 지훈은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것인가 생각했다.


“노부(老婦)가 잘하믄, 내가 여까지 올 일이 있겠나.”


처음 듣는 음색이었고, 말투였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길 중간 어디쯤에 붙어 있는 이 마을에는, 딱히 말투가 억센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았다. 개중 하나, 멀리 전라도 어딘가에서 시집왔다는 한 아낙 정도가 아직도 제 고향의 말씨를 차마 버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 밖에서 들리는 사내의 목소리며 말투는 동리 사람 중 누구의 것과도 달랐다.


“아가 저래 천지사방을 모르고 나대는 동안 노부는 뭘 했는데.”


그것은 엄연한 꾸지람하는 말투였다.

지훈은 꾸역꾸역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지훈이 아는 한, 조모 유화는 세상에서 제일 드세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그 외의 모든 동리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 중에는 감히 조모에게 말대답을 하기는커녕 감히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조차 없었다. 그러나 문 밖에서 들리는 그 젊은 남자의 음성은, 그런 조모를 분명히 힐책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그런 원초적인 궁금증에 몸이 달아오른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가.”


문을 밀어 열자 오래된 경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유화는 뒤를 돌아보더니, 한달음에 지훈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파리하게 질린 지훈의 낯을 들여다보고 이마며 뺨을 다려보는 손등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이 퍽 거칠지언정, 이 사람에게 내가 소중하다는 것은 이런 순간이면 늘 지훈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지곤 했다.


“괜찮으냐?”


채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지훈의 몸은 여윈 조모의 품 속에 덥썩 싸였다. 지훈의 눈이 저를 붙들어 안은 유화의 어깨 너머,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그 눈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음성을 들었을 때부터도 생각했지만 젊은 사내였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훨씬 젊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방학 때가 되어야 집에 한 번씩 다니러 오는 동네 이장 댁 셋째 아들과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조모에게 그런 건방진 말투로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화는 홱 몸을 돌려 돌아앉았다. 제 품에 끌어안은 지훈이 사내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밤늦었네. 가 보소.”
“….”
“어여.”


그것은 어린 지훈이 듣기에도 축객(逐客)의 뜻이 분명한 말투였다.

사내는 스스럼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온다는 말도 간다는 말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대문간을 지났다. 그리고 순간, 지훈은 안간힘을 써서 조모를 밀어내고 마루 아래로 내려 사내를 따라 대문간을 넘었다. 웬지, 이대로 보내면 안 되는 사람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등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조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름을 부를 뿐 쫓아와 붙들지 않는 것을 핑계로 지훈은 사내의 뒤를 따랐다.

어른의 한 걸음은 아이의 두 걸음인지, 그리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도 사내는 이미 자취가 없었다. 지훈은 대문간을 너머 제법이나 한참 길을 따라 뛰듯이 걸었다. 드문드문 불이 들어온 가로등이 노란 빛을 내었다. 그 빛에 달려드는 날벌레들의 그림자가, 어둠을 타고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나 간 끝에, 지훈은 저만치서 휘적휘적 걷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한첨이나 전부터 저를 쫓아오는 기척이 있음을 알았던지, 그는 더 이상 가지 않고 길에 서서 지훈이 오고 싶은 만큼 따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까지 다가선 지훈은 고개를 처들어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조모의 어깨 너머 보았을 때부터도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은 어쩐지 묘한 눈빛을 하고 있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 눈은 아주 새까만 것 같기도 했고 아주 엷은 갈색인 것 같기도 했고, 심지어는 한겨울 밟아 짓이긴 눈 같은 회색인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보아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왜.”


한참동안이나 저를 올려다보는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내가 물었다.


“뭐 할 말 있나.”
“….”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라니. 그런 것 따위는 미처 생각해 놓지 못했다. 아까 나를 살려준 게 당신인지, 그런 거라면 감사하다는 말 같은 걸 얼른 생각해 내기에는, 그 때의 지훈은 아직 턱없이 어렸으므로.


“혼자 산에 가고, 그라지 마라. 친구들하고, 동네 안에서 놀고.”
“….”


난 같이 놀 친구 같은 거 없는데.

그러나 지훈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해 지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그것은 사내가 아니라도, 조모에게서 늘 듣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으레 하는 단도리인지 아니면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지훈이 거기까지 눈치채는 것은 무리였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지훈을 보며, 사내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지훈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은, 지훈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받아보는 조모가 아닌 타인의 인사였다. 지훈은 그 자리에 서서, 사내가 몸을 돌려 마을 어귀 저 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그 뒷모습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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