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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회자정리會者定離 1











『서산 앞쪽 지는 해는 내일 아침에 다시 돋고 월출 동녘에 뜨는 달은 오늘밤에 오련만은
인생이라 허는 것은 청춘 가고 백발 오니 회생할 길 아예 없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니 이미 헤어짐이 있다










당골네 손자, 라고 하면 그건 대개가 지훈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훈의 조모인 유화는 인근에서는 꽤나 유명한 만신무당이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된 후로, 그녀는 멀쩡하게 하늘을 잘 날던 비행기가 떨어질 것도 맞추었고 백화점 건물이 무너질 것도 맞추었고 한강다리 허리가 끊어질 것도 맞추었다. 그녀의 신기가 한참 좋던 시절은 얼굴 한 번 비추고 공수 한 번 받는 데만도 그 당시 돈으로 하룻밤에 몇 백이 오고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호시절 한때의 이야기였다. 몸주신의 신령이 떨어져 헛괘가 돌기 시작한 이후, 그녀는 이제는 곡절도 없던 고향에 돌아와 가끔씩 잡히는 소소한 굿판으로 연명을 했다. 사방으로 울긋불긋한 오방기가 요란하게 내걸린 그녀의 집은, 누가 보아도 갈 데 없는 무당의 집이라, 동네 사람들은 괜히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움찔 목을 한 번 움츠리곤 했다.

그리고, 지훈은 그런 무당의 집에 사는, 무당의 손자였다.

지훈은, 고놈 눈이 참, 계집으로 났으면 사내 여럿 홀리겠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 미상불 젖내 덜 가신 뽀얀 얼굴에 휘둥그런 눈은, 워낙에 크기도 하거나와 눈초리가 또렷하니 곱기도 해서 얼굴에 눈 빼면 아무 것도 없노 하는 동네 아낙들의 말을 더러더러 듣기도 했다. 무슨 놈의 사나 자슥 눈이 저래 하늘의 별 같아서, 필시 제 팔자가 사납거나 주위 사람 여럿 잡아먹을 눈이지 하고 두런거리고 있자면 도대체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는지 지훈의 조모인 유화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입에 방정이 들었으니 입살로 망하리라는 악담을 퍼부으며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 것이나 휘둘러 그 말을 꺼낸 아낙에게 달려드는 것이 통례였다. 이 년, 이 망할 년, 남의 집 손자를 두고 망령되이 주둥이를 놀리니 그 살이 돌고 돌아 다 네년의 서방이며 네년의 아들놈 딸년에게 갈 것이라는 그녀의 저주에는 섬뜩한 데가 있었다. 실제로 뜻없이 지훈의 정해지지도 않은 팔자를 두고 이러느니 저러느니 한가로운 입살을 태우던 몇몇 아낙의 집에 아무개는 뺑소니 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고 아무개는 주식이 망해 적지 않은 돈을 날렸고 아무개는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던 그 집 아이가 몇 년이나 대학 시험에 떨어졌다더라 하는 식의 정말 저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액이 들고부터는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지훈의 팔자 운운하는 말을 꺼내는 아낙은 동리에서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귀를 알아듣는 어른들 사이의 문제였다.

동리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의 지훈은 ‘귀신 붙은 애’ 정도로 통했다. 담력이 약한 여자아이들은 지훈을 마주치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맞대놓고 재수 없다며 땅바닥에 침을 뱉거나 저희들끼리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킥킥거리곤 했다. 개중에는 길가의 돌멩이를 주워서 던지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어디서 주워들은 어설픈 욕지거리를 주워섬기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훈의 반응은 또 너무나 아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 되레 보는 사람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지훈은 기본적으로 말이 없는 아이였다. 누가 어떤 말을 물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꼭 입을 열어 해야 할 말은 최대한 짧게, 꼭 해야 할 말만을 했다. 그것은 저를 놀리는 말들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훈은 제게 무슨 말을 하든, 그에 대해 쓰다 달다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제가 하는 조롱의 말들에 지훈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울컥 소갈머리가 오른 남자아이 하나가 던진 돌멩이에 맞아 피가 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게 돌을 던진 아이의 앞을 지나쳐,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외려 뒤에 남은 아이가 놀라움과 약오름을 견디지 못하고 서럽게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손자의 이마에 상처가 난 것을 본 유화는 말없이 피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손자가 어찌 대꾸했을지를 알아서, 그녀는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차려준 밥을 다 먹은 후 말없이 제 방으로 돌아가는 지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화는 떨리는 손으로 궐련 한 대를 피워 물고는, 올해 예순 둘인 제가 올해 일곱 살인 저 놈이 몇 살이나 먹을 때까지 살 수 있을지를 어림해 보았다.










친구가 없는 지훈이 주로 가 있는 곳은 마을 뒷산 중턱이었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저들이 하는 놀이랬자 별 것도 없으면서, 떼를 짓고 무리를 지어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아이들이 지훈은 미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저 하나가 분해 하고 눈을 흘긴다 한들 그 무엇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임을 지훈은 이미, 그리고 벌써 알았다.

일부러 다져 놓은 듯 평평한 땅에 돌 몇 개를 주워다 혼자서 땅따먹기를 했다. 혼자서 하는 것은 재미가 없어서, 나중에는 돌을 두 개 주워다 놓고 한 번은 제가 되어, 한 번은 남이 되어 돌을 튕기고 그만큼 금을 그어 땅을 차지했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둘로 갈라 하는 편이 재미있어서 지훈은 노상 늘 거기서, 두 사람 몫의 땅따먹기를 하면서 놀았다.

신기한 것은, 그냥 이름만 지어놓고 돌을 튕기는 것은 같은 사람인데도 잘 되는 편이 있고 잘 되지 않는 편이 있다는 거였다. 오늘은 ‘지훈’이 잘 안 되는 날이었다. 힘을 주면 돌은 금을 그어놓은 영역을 벗어나 버렸고, 힘을 주지 않으면 얼마 튕겨가지를 못해 턱없이 작은 땅들만이 들어왔다. 반면 저 쪽―아직 이렇다 할 이름까지는 지어주지 못했다―은 뭔가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시원시원하게 돌이 날아가, 성큼성큼 중간의 빈 땅들을 제 것으로 집어갔다. 어차피 이쪽도 자신이고 저쪽도 자신인데도, 제 이름이 아닌 저 편이 잘 풀리는 것이 지훈은 종내 골이 났다.


“안 해.”


결국, 볼이 잔뜩 부은 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돌을 힘껏 집어 내던졌다.


“안 한다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지훈은 발끝에 힘을 주어 기껏 그어놓은 금들을 죄다 밟아 뭉갰다. 상대가 없으니 부릴 수 있는 심통이었다.


“안 놀아.”


수태 들어보기는 했어도,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지훈은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는 뒤로 돌아섰다. 이미 기분은 상할 대로 상했다. 그냥 이길로 산을 내려가 집으로나 돌아가야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날아온 돌이 지훈의 뒤통수를 때렸다.

따끔 하는 충격, 그러나 그를 앞선 의아함에 지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저 쪽’의 땅따먹기를 할 때 썼던 납작한 돌멩이가 떨어져 있었다. 분명히, 아까 저리로 던져버렸던 것인데.

툭.

그리고, 지훈이 보는 앞에서 그 돌멩이는 몇 뼘인가 움직였다. 누가 손 끝으로 적당히 힘을 주어 튕긴 것처럼.


“….”


좀체로 동요하는 일 없던 지훈의 어린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지훈이 보는 앞에서, 그 돌멩이는 다시 두 번을 튕겨져 날아가 ‘저 쪽’의 영역으로 정해놓았던 금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지훈의 어린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하는 사이, 돌멩이는 모로 서더니 길다란 금을 그렸다. 이만큼은 내 땅, 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툭 소리를 내며 다른 돌멩이 하나가 지훈의 발 앞에 떨어졌다. 끄트머리가 움푹 파인 것을 보니, 조금 전 자신이 썼던 돌멩이였다.

이제, 내 차례라는 건가.

지훈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훈이 한 발을 물러서자 돌멩이는 지훈을 따라오듯 앞으로 따라왔다. 물러나는 지훈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저쪽 편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지훈의 뺨을 맞고 떨어졌다. 그래도 지훈이 돌아오지 않자, 날아오는 돌멩이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귀신 붙은 아이.

순간 지훈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지훈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엉겁결에 팔을 들어 얼굴 앞을 가렸다. 팔로, 어깨로, 다리로 와서 맞는 돌멩이들은, 아프다기보다는 공포였다. 동네 사람 모두가 저를 보고 숙덕대던 그 ‘귀신’이라는 것이, 정말 이런 식으로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래서 지훈은 제 걸음이 제법 커다란 바위 끝쪽으로 몰린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한 발 더 뒷걸음질을 치려던 지훈의 어린 몸은, 속절없이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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