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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춘풍추우春風秋雨 8

-무너진 왕조의 왕세자가 사는 법











춘풍추우春風秋雨
봄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비
지나간 세월歲月을 이르는 말










그날 점심도, 세자는 거의 입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겼다.

오늘도 꽤나 집어드셨던데요, 라고, 이제는 꽤나 친해진 행정궁관은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속삭이고 지나갔다. 오늘 담아둔 것은 딸기 퓨레가 든 초콜렛이예요. 맛있죠. 하나만 먹고 그만두기는 쉽지 않기는 할 거예요 라는, 그다지 물어보지 않은 부연 설명이 따라왔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밖에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김 원사에게 담배라도 한 대 피우자는 말을 해볼까 하다가, 다니엘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터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 그와는 서슴없이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그렇게까지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정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와 아제는 잔디가 다 죽어버린 정원의 어느 구석에서 다니엘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는 한 옆으로 한자로 자그마치 용龍자가 새겨진 이 라이터는 사실 다니엘의 취향으로는 많이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 것은 작년 생일날 태자가 직접 골라 선물―이라기보다는 하사에 가까웠지만―한 물건이었다. 1년 가까이 정을 붙여 쓰다 보니 그럭저럭 정은 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어딘가 분에 넘치는 물건으로 느껴지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정확히 두 모금을 빨았을 무렵, 저 쪽 민언궁의 정원 한 구석에,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둥글게 웅크려 앉은 사람이었다. 옅은 보라색, 혹은 자주색, 그 어느 색깔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빛깔의 옷이었다. 이 뻔하디뻔한 궁에 저런 묘한 색깔의 옷을 입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저기 쭈그리고 앉아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다니엘은 손에 든 담배를 비벼 끄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세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했더니, 세자는 어린 길고양이의 재롱에 정신이 팔려 등 뒤로 사람이 다가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양이는 풀밭에 배를 까뒤집고 드러누워 세자가 손가락 끝으로 턱을 간질이는 대로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태어난 지 한 달은 되었을까. 고양이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기는 한가 싶은 어린 녀석이었다.


“엇.”


그러나 고양이는 세자와는 달리 다니엘의 기척에 민감했다. 낯선 사람의 낌새를 채고 후다닥 달아나버리는 새끼 고양이의 자취를 한없이 눈으로 쫓다가, 세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복 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조심성이 없는 녀석이군요.”


다니엘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세자는 그런 그의 얼굴을 말없이 돌아보았다.


“조심성이 없는 게 아니라.”


대답하는 목소리는 잘게 갈라지고 있었다.


“나를 잘 알고, 믿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도대체 무엇을 하셨기에?”


다니엘은 웃으며 되물었다.


“기껏해야 배를 채울 만한 뭔가를 몇 번 주신 정도겠지요.”


고양이라면 다니엘에게도 친숙했다. 전선의 진지에 둔영할 무렵, 남은 반찬과 밥을 모아서 버리는 쓰레기통 근처에는 근방의 고양이란 고양이들은 죄다 몰려들어 시끄럽게 울어대곤 했다. 개중에는 취사병들에게 재롱을 잘 부려 대놓고 남은 반찬을 얻어먹게끔 되는 녀석들도 있었다. 부대를 총솔하는 장교들 중에서는 그런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해 쥐약을 놓아 고양이를 다 죽여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니엘은 적당히 못 본 체 넘어가는 편이었다. 아무리 전장이라고 해도, 사람에게는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한 법이므로.


“그게, 잘못인가?”


세자는 언성을 돋우어 물어왔다.


“이 곳에 오고 난 후 하루도 입맛이 돈 적이 없어. 그래서 내 몫으로 나오는 반찬 몇 가지를 집어다 저 녀석에게 준 것인데.”


여기서 하마터면 그래서 사탕이며 초콜릿은 그렇게 열심히 집어 드시고 계시는 거냐고 물어볼 뻔 했다. 다니엘은 짐짓 헛기침을 해 쓸데없는 말을 눌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상대는 우방국의 왕세자 겸 국빈이었다.


“그게 잘못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전하.”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든 축생이든, 배를 주린다는 것은 필경 가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신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방금 귀관의 말은 별로 좋은 뜻으로는 들리지 않았는데.”
“전하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의 입장에서는, 때아니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 그의 손에 먹을 것을 얻어먹는 요즘이 편안하겠지요. 그러나.”


그쯤에서 세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그 뒤에 나올 말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세자께서 이 곳에 천 년 만 년 머무르실 것도 아니겠고.”
“….”
“그렇게 그 손에 먹을 것을 얻어먹는 버릇을 들여놓고 떠나시면, 저 녀석은 어찌 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자의 어린 뺨이 가볍게 씰룩거렸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심, 그가 무슨 말을 할 지를 은근히 기대했다.


“천 년 만 년이라.”


세자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귀국에서는 나를 빨리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의사가 있기나 한 것인가?”
“전하.”
“혹시 모르지 않는가.”


세자는 몸을 틀어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이 궁에, 내 천 년 만 년 붙들려 이 궁의 귀신이 되려는지.”


알고 있다.

순간 다니엘은 멈칫했다. 세자는 이미 자신의 처지를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절이 아닌, 인질. 언제나 이 궁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신세라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과연 돌려보내 주기는 할 셈이냐고.


“그 말씀은.”


그러나 다니엘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세자의 말에 대꾸했다. 세자는 그 말로 인해 자신이 뜨끔하거나 움츠려들기를 원했겠지만, 세자가 이 궁에 연금된 사실에 아무런 기여가 없는 다니엘로서는 딱히 그 사실이 가슴 아프지도, 마음에 사무치지도 않았다.


“최소한 손목을 긋거나, 다시 흉한 약을 드시는 일은 없으시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지요?”
“….”


세자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이 소년은, 자신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말을 한꺼번에 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고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말과, 이 궁에 천 년 만 년 붙들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본국으로 귀국하실 때 저 녀석을 데려라도 가실 요량이십니까.”


곤란한 이야기를 별로 길게 끌고 싶은 기분은 아니어서, 다니엘은 그쯤에서 말을 돌렸다.


“그런 게 아니시라면.”
“….”
“섣불리 기대게 하지 마십시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을 하면 또 무어라고 되받아올까. 그런 것이 내심 궁금했다. 그러나 세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새삼 다른 어떤 것이었다.


“과연, 그러하군.”


결곡한 입술이, 살짝 다물어졌다.


“명심하겠네.”


고개를 돌리는 그 얼굴은, 뜻밖에 슬펐다.










+.

오늘 하루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괜찮으시냐는 안부를 여쭙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저는, 그냥 이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다가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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