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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춘풍추우春風秋雨 7

-무너진 왕조의 왕세자가 사는 법











춘풍추우春風秋雨
봄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비
지나간 세월歲月을 이르는 말










잠시 후 도착한 의전차량을 타고, 두 사람은 민언궁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령장에 적힌 날짜가 지나, 다니엘은 온전히 이 궁의 경비 책임자가 된 셈이었다. 궁 앞에 서 있던 초병들부터 궁 안의 모든 사람이 밖으로 나와 다니엘에게 인사를 했다. 어쩐지 그들에게는 곁에 있는 세자보다 자신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부임 인사를 하기도 전에 세자는 굳어진 얼굴로 무어라고 중얼거리고는 집무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굳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이미 다 끝난 통성명을 할 기분도 딱히 들지 않아, 다니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1층에 있는 경비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료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있던 김 원사가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별 일 없으셨습니까?”
“별 일이래야.”


다니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의자를 물리고 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수면유도제로 자살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입니다.”


어설프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목숨이란 생각보다 별 것 아니기도 하고, 생각보다 별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저 어린 세자는 뭘 어떻게 해야 제 목숨이 끊어지는가, 그 부분에 대한 감이 별로 없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니엘에게는 적지 않은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저렇게 혼자 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원사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또 무슨 험한 마음이나 먹지 않을지.”
“두고 봅시다. 최소한 오늘은 아닐 것 같으니.”


다니엘은 흘끗, 문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바라는 만큼의 소동을 피웠으니 며칠간은 잠잠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그의 소회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잠심을 먹고 난 오후, 태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연락을 하였더니 이미 퇴원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그마치 자진을 기도한 사람이 그리 일찍 퇴원을 해서 괜찮은 것이냐는 온공한 힐책이 있었다. 세자가 복용한 약물의 양이라는 것은 치사량에 한참 미치지 못할 뿐더러 본인이 굳이 퇴원해 환궁할 것을 주장하는데 저라서 말릴 도리가 없었다는 다니엘의 대답 속에도 어렴풋한 짜증이 섞였다.

태자와의 짧은 통화를 끝낸 후 다니엘은 민언궁의 행정궁관을 불렀다. 그녀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쯤 많을 것 같이도 보이는 여자였다.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자리에 앉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지없이 심드렁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41 헌경대 대장 강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차를 권하고, 몹시 형식적인 말투로 입을 떼었다. 직급으로만 따지자면야 자신이 한참은 위이겠지만, 다니엘은 엄연한 군인이었고 그녀는 군속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므로 가급적 차릴 수 있는 예의는 차려야 했다.


“네, 뭐.”


그녀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오늘 부임하셨다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다니엘은 잠시, 차를 마시는 핑계로 말을 끊었다.


“행정궁관이시라면, 그렇군요. 이 곳보다 좋은 곳도 많으셨을 텐데.”


여기서 그녀는 허를 찔린 듯 움찔했다. 그녀의 그런 낌새를 채고 다니엘은 느긋하게 웃었다. 처음 자신의 호출을 받고 이 방에 들어서던 순간, 그녀의 표정에 어린 희미한 짜증은 자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인 것을 다니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벽진 곳으로 발령나 버린 사람들끼리의 동병상련이랄까.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 요량이었다.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뭘요.”


그녀의 말투는 떨떠름했지만 조금은 자신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진 듯도 보였다.


“뭐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기는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소령님도.”
“저야 뭐.”


다니엘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이니까요.”


순간, 그녀의 눈에 동정하는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다니엘은 분명히 보았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전선이 아닌 후방으로 부임하는 경우, 군무원이 아닌 민간인들이 군인에 대해 갖게 마련인 막연한 적개심에 대해서는 다니엘도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오늘의 자리는 그것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터였다.


“뵙기를 청한 건.”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세자께서 어젯밤에.”


거기까지만 말했으나 그녀는 곧바로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띄라는 듯 다니엘은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헌데 이 분이 태자 전하께서도 몹시 마음을 쓰고 계시는 국빈이신지라.”
“네, 그렇다더군요.”
“덕분에 제가 아주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다니엘은 담백하게 웃었다.


“저 윗전에 계시는 분들이야 사람만 붙여놓으면 어떻게 어떻게 되는 줄로 알고들 계시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녀는 스스럼없이 맞장구를 쳐 왔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그녀에게서 어느 정도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쭙습니다만, 세자께서는 식사는 잘 하고 계시는지요?”
“그다지요.”


그녀는 대뜸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반 정도 드시면 많이 드신 편이고, 한 두 숟갈 뜨다가 마시는 날도 많고요.”


거기까지는 대략 예상한 바였다. 제 목숨의 무게를 어떻게 생각하든,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 마음을 먹는 사람에게 식욕 같은 것이 딱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튀어나온 그녀의 말 한 마디가 다니엘의 상념을 흩어놓았다.


“단 걸 그렇게 드시니 밥맛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단 것?”
“네.”


그녀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세자께서 주로 머무시는 집무실에는 본래 약간의 스윗츠를 준비해 둡니다. 그런데, 그게 꼭 먹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음, 그러니까.”


그 ‘스윗츠’라는 단어의 선택이 미묘한 느낌을 주었다. 다니엘은 입 속으로 이 낯선 단어를 가만히 굴려 보였다. 초콜릿도, 사탕도 아닌, 스윗츠.


“입가심 정도의 의미란 말이군요.”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죠.”


그녀는 지그시 미간을 찡그렸다.


“아시다시피 민언궁에는 오래 주인이 없었고, 그래서 그 스윗츠는 한동안 손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제가 오며 가며 한두 개 집어 먹은 게 다일 텐데요.”


그녀는 입을 지그시 다물고 좌우로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


“그런데 세자께서 오시고부터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통이 비고 있어요.”
“이틀에 한 번 꼴로?”
“네. 가득 담으면 보통 40개 정도가 들어가니까 하루에 스무 개 남짓 드시고 계신 거죠.”


하루에 단 것을 스무 개 남짓이나 먹고 있다.
아까 그 퉁명스러운 세자에게 그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언뜻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다지 단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그러니까 말이죠. 사람 겉으로만 봐서는 몰라요.”


그녀는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집무실 휴지통을 보면 까먹은 초콜렛 껍질이나 사탕 껍질만 소복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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