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춘풍추우春風秋雨 6

-무너진 왕조의 왕세자가 사는 법











춘풍추우春風秋雨
봄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비
지나간 세월歲月을 이르는 말










재환과의 술자리가 파한 것은 꽤 늦은 밤이었다. 바쁜 것 같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방해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재환은 취기 오른 얼굴로 손을 내젓고는 나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러 이런 날이 하루 쯤 있어도 된다며 웃었다.

다니엘은 재환과 헤어져 수도경비사령부 인근의 관사로 갔다. 이 곳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이후부터 쭉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고 새 집도 아니었지만,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었다. 특히나 이 때아닌 전쟁으로 1년 넘게 전선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집이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가끔은 그것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가 무척이나 덧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돌아온 것인지 기억도 안 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다니엘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연 이틀 술을 마신 속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아마도, 내일부터 부임하게 될 민언궁과 그 궁의 빈객에 기인한 것일 터였다.

쓸데없는 짓을 해 주어 감사하다던 그 목소리, 그 얼굴이 떠올랐다. 보기로도 썩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지만 재환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기껏해야 열아홉이 아니면 스물 정도 먹은 애송이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그런 표정에 그런 말투라니. 어이가 없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그러고 말 것 같지가 않은데.”


보름 사이에, 그는 이미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어제 그의 언사를 볼 것 같으면 앞으로도 그런 유사한 일은 또 벌어질 참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골치 아픈 것에 엮여들고 말았다는 생각에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게 고작이었다. 한참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니엘은 꿈틀거려 이불을 쓰고 돌아누웠다. 침대에 누워 잡생각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첫 출근을 어디로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다니엘은 민언궁이 아닌 병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태자와의 통화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은 한동안 사는 사람도 없던 빈 궁이 아니라 그 궁에 빈객으로 온 소량의 왕세자라는 사실이었으므로.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서 어떻게 기별이 간 것인지 어제 얼굴을 보았던 군의관이 부리나케 달려나와 경례를 붙였다. 그를 앞장세워 세자의 병실로 들어간 다니엘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세자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제 나름의 퇴원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고집스레,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대답 대신 옆에 선 군의관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표나게 찌푸려진 미간을 한 채, 긍정의 기색도 부정의 기색도 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퇴원해도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회복은 된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으로, 다니엘은 그의 그런 기색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딱딱한 음색으로, 다니엘은 그렇게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퇴원 수속을 하고,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나 혼자 돌아가겠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크고 둥근 눈이 몇 번을 깜빡여, 다니엘의 얼굴 가운데 또렷하게 붙박혔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만, 그는 그야말로 ‘왕자’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뽀얀 얼굴에 크고 선이 분명한 눈매와, 콧대와 입술선까지. 그는 이 복잡한 시대의 어느 거리에서라도, 어깨를 부딪고 한 번쯤은 돌아볼 법한 고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소량이 아니라 서하의 황자였다면, 아마 유력가 영애들의 소일거리가 하나쯤은 더 늘었을 텐데.


“저, 소령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곁에 섰던 군의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러면, 퇴원을?”
“그러지.”


세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니엘은 입만으로 군의관에게 지시했다.


“퇴원 수속을 부탁하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군의관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부리나케 병실을 나가 버렸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한참을 멀어져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관의 직분은 민언궁의 경비가 아닌가.”


세자의 목소리에는 역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민언궁에 잠시 머물고만 있을 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일세.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정녕 있는가?”
“말씀하신 바 소관의 직분은 민언궁의 경비인 것이 맞습니다. 그 말은.”
“….”
“민언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소관의 책임 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자의 미간이 초조하게 찌푸려졌다. 그것은 마치 뜻하지 않은 일로 좋아하는 소녀와의 밀회 장소에 나가지 못하게 된 소년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니엘은 더럭 짜증이 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훼방당한 일이, 그렇게나 안타까워할 일인가 싶어서.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정녕 있느냐시니.”


그래서 다니엘의 말투는 필요 이상으로 삐딱해졌다.


“장차.”


다니엘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서 세자의 정복 깃을 괜히 한 번 바로잡아 주었다. 잡아당긴 깃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목덜미의 울혈 자국에 닿아 쓸렸다.


“이런 짓을 하시고서 말입니다.”
“….”


세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더러운 것이라도 쳐 내듯 다니엘의 손을 탁 쳐내고는 제 손으로 다시 깃을 쓸어내려 가다듬었다. 사실 별로 바로잡을 것이 없던 매무새여서, 이러나 저러나 큰 차이는 없기도 했지만.


“다음은 뭘 염두에 두시고 계십니까. 손목이라도 그으실 요량이신지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애써 대답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감안해 보겠네.”
“황공하옵니다.”


다니엘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다만, 실행하시기 전에 살짝 귀띔이라도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두 사람은 병원 정문 아래로 내려왔다. 궁에서 오는 의전차량을 기다리며,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때 아닌 신경전을 벌인 탓인지, 오전엔 좀체 느낀 적 없던 공복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 번거로운 빈객을 옆에 두고는 밥은커녕 물 한 모금이라도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궁으로 돌아가 세자를 제 자리에 데려다 놓고, 그 후에―


“….”


옆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흘끗 곁을 돌아보니, 세자는 멀리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니, 그 곳에는 주먹밥 같은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좌판이 있었다. 간병 혹은 문병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좌판이었다. 원래라면 저기서 좌판 장사를 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그 먹거리라는 것이 제법 요긴하기도 해서 병원에서도 모른 체 눈감아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런 것을 저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세자의 표정이라는 것은 다소 낯설었다.


“전하.”


다니엘은 세자를 불렀다.


“뭘 그리 보시고 계시는지.”


세자는 뜨끔 놀라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 뜨끔 놀라는 기색을 보니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혹시.”
“….”
“시장하십니까?”
“아니.”


세자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대답은 너무나 단호해서, 다니엘조차도 자신이 느낀 것이 약간의 머뭇거림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저, 이 곳의 백성들 또한 사는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
“뭐 그런 생각을, 잠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세자는 흘끗 눈을 돌려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귀관과 같은 일개 군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3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