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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열대야증후군熱帶夜症候群 6

-언령











일본의 민간 신앙 중 ‘언령’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말에 깃든 영적인 힘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도, 언령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는 아니라도, 말이 씨가 된다는 둥 하는 속담이 있다. 뭔가를 생각만 하는 것과, 입 밖으로 끄집어 내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그래서, 방금 입 밖으로 뱉어내 버린 그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듣고 있는 지훈보다도 말을 한 다니엘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지훈은 눈에 띄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엘은 고개를 숙인 채 마티니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으로 동요의 기색을 감추었다. 관 속까지 가지고 들어갔어야 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뒤가 저리기도 했지만 어딘가 후련하기도 했다.


“저, 고객님. 아니, 저, 다니엘 씨.”


한참만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나마 지훈이었다. 몹시 더듬거리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두 분 사이의 문제가 어떤 건지,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걸 당신이 알 리가 없지. 다니엘은 생각했다. 당사자들도 모르는 것을, 제 3자도 아니고 제 4자 쯤 되는 지훈이 어떻게 알겠냐고. 애초에 그 ‘두 분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같은 게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결혼에 그렇게까지 확신이 없으신 거라면, 차라리 여자분한테 솔직하게 얘기를.”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딴에는 그지없이 진지한 지훈의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는 지금 농담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섞이지 않은 일생에서 가장 진지한 말을 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그 결과라는 것이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라, 그게 문제였을 뿐.


“미쳤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그렇게 물었다.


“지훈 씨 여자 사귀어 본 적 없어요?”
“네?”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이니까, 결혼할 여자까진 아니라도, 좀 진지하게 여자 사귀어 본 적 없어요?”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라나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건 대개는 옳은 말이긴 하다. 그러나 대개의 ‘옳은 말’들이 그러하듯, 그 말 또한 현실적으로 선택하기 쉽지 않은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이런 경우처럼.


“그런 얘길.”


다니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결혼할 여자한테.”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수월하게 되물을 수 있었다. 대번에 눈앞에 그러진 것은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누구나 안다. 사랑이 끝나는 것은 반드시 상대가 ‘싫어졌’거나,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좋아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수도 있고, 사랑해도 결혼하고 싶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런 것을, ‘결혼할’ 여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해요.”


순간, 다니엘은 지훈의 얼굴에 스쳐가는 균열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한 말 중 어떤 것이, 이 입바른 플로리스트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도.


“이런 말씀 죄송한데.”


들먹거리는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니엘은 지훈이 몹시 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려고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비겁하신 거 같아요.”


지훈은 한참을 우물거리다, 그 말 한 마디를 뱉아놓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그래놓고도 한참이나 눈치를 살피듯, 그 큰 눈으로 가만히 다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결국 그거잖아요. 이 이야기 대놓고 꺼내면, 여자분이 화를 낼 거니까.”
“화를 낼 거니까가 아니고.”


일단 말을 잘랐으나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지금 하려는 말과 지훈이 방금 한 말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스스로도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지훈이 한 그 말이 사실은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상처받을 거니까.”
“그게 그거잖아요.”
“좀 다른데.”


그러나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어, 기어이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냥 화만 내는 거면, 그건 어떻게든 내가 감당할 수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다니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자의 기분을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잘 읽고 잘 맞추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끔 눈 앞이 아찔해 올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순순히 인정해버릴 수는 없었다. 이 사람의 앞에서.


“그런데, 이 얘기를 하면 분명히 상처받을 거니까.”
“저 같으면.”


결곡하게 내뱉는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저랑 결혼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결혼에 확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게 더 큰 상처일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다니엘은 커다랗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말 안하잖아요.”
“….”
“알아봤자 별 수 없는 지훈 씨 같은 사람한테나 말하고.”


그냥, 말할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입이 근질거려서, 가슴이 들썩거려서, 임금의 두건을 만든 장인이 대나무숲에 가서 소리를 질렀듯이, 이 일을 알아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사람에게나마 털어놓고 싶었던 건지도. 그래서인지, 가슴 속이 잠시 후련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도대체 뭘 어쩔 생각인데요?”
“어쩔 생각이냐고요?”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뭘 어쩔 셈이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은 거짓말처럼 다시 답답해졌다. 다니엘은 멍하니 지훈을 바라보았다.


“참아야죠. 별 수 있어요?”


그것은 지훈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꾹 참고.”
“….”
“그냥.”
“….”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 그 말만 되뇌면서.”
“….”
“그렇게 살아야죠.”
“그게 뭐예요.”


그러나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훈은 그렇게 들이받듯 되물어왔다.


“여자분한테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그럼요? 뭐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


지훈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는 입 속에 고인 말을 제대로 뱉어내지 못했다. 할 말이 있기나 한지, 있다 한들 그 말을 대놓고 할 수 있긴 한 종류의 말인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니엘은 심술궂게 웃었다.


“거 봐요. 지훈 씨도 별 수 없죠?”
“….”
“그러니까, 그냥.”
“그럼, 다니엘 씨는요.”


의기양양하게, 이쯤에서 이 판이 이미 외통수인 걸 인정하라.

그런 말을 하려던 다니엘은, 지훈의 반문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앞으로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같은 집에서, 같은 침대에서, 그렇게 산다고요?”


너무나 당황해서,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했다. 온통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같은 집에서, 같은 침대에서 살아가게 될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한테 안 미안해요?”










+. 연재하는 속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느려졌습니다. 저는 원래 짧은 분량을 연재 속도로 때우는 편이었던지라 이 지지부진한 글 봐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야기 자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좋은 걸 좋은 때 좋은 만큼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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