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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열대야증후군熱帶夜症候群 5

-고객님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간 순간, 두 사람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말을 들은 지훈이 놀란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다니엘조차 스스로 놀랐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유지하고 있던 일종의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이 버거워 연신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안간힘을 다해 삼키곤 했다. 그러나 그 비밀 같은 한 마디는, 이렇게나 어이없게도, 입 밖으로 순식간에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한참만에야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그나마 지훈이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분이랑.”


아까 그 눈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억지로 플라워 샵에 가서 그것이 그것 같아 보이는 꽃장식들 중 하나를 고르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있던 자신을 따라 나와 당신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용될 것을 고르는 데 최소한의 성의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또박또박 따지던 그 눈이라고.

그러니까, 요컨대, 모든 건 그 눈 때문이었다.


“왜 결혼을 해요?”


새되게 묻는 목소리는 쨍 하고 갈라졌다. 항의라도 하듯이. 따지기라도 하듯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힐책하기라도 하듯이.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이 빠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


그래서 그 말에 대꾸하는 다니엘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피곤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언제나 다니엘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이 미지근한 마음이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지금의 이 상황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처럼 느껴졌다.


“난 어쩌다 결혼까지나 하게 됐을까요.”


지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징후는, 마주 앉은 자신의 눈에까지 너무나 선명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나름 ‘꽃이란 다 그것이 그것 같아 보이는 보통 남자’에게 꽃을 설명해 주러 나온 플로리스트 같았는데, 다니엘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지훈은 분주히 크지 않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마 그 또한 느낀 것일 터였다. 자신이 지금 매우 아슬아슬하게 평형을 유지하고 있던 뭔가를 손 끝으로 툭,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을.


“저기, 고객님.”


그 호칭은 아까부터 귀에 거슬렸다.


“제, 제가 고객님의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 같은 건 하나도 없지만요.”


이미 이래라 저래라 했잖아요.

그렇게 대꾸하고 싶어졌다.


“결혼이라는 게, 아니 결혼 준비라는 게 굉장히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 보기로도 그랬고요. 그렇잖아요. 고객님도, 신부님도, 다 편하게 결혼 준비만 하시는 게 아닐 거고, 각자 따로 하시는 일도 있으실 건데 시간 쪼개서 이 것 저 것 챙기셔야 하고요.”
“다니엘.”


지훈이 하는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독 그 ‘고객님’이라는 인정 없는 호칭만이 밥 속에 섞여 들어간 쌀겨처럼 입 속을 굴러다녔다. 그가 그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상 무슨 말을 한들 귀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네?”
“다니엘이라고요. 내 이름.”


그래서, 다니엘은 내뱉듯이 말했다.


“성은 고 씨고 이름은 객님, 이 아니고.”
“아, 그렇지만….”
“난 나를 고객님 따위로 부르는 사람한테 내 인생 간섭받고 싶은 생각 같은 거 눈곱만큼도 없어요.”
“….”


지훈은 다시 한 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너무나 크고 그 선이 뚜렷해서 난처한 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기색까지 그다지 애를 쓰지 않아도 역력하게 모두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색을 못 본 체 하고 다니엘은 앞에 놓인 마티니를 한 모금 마셨다.


“네, 저, 그러니까, 다니엘 씨.”


그것도 어째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고객님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니엘은 가만히 한숨을 몰아쉬고 지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튼, 그래가지고.”


그러나 지훈은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마 제가 어디까지 말했는지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각자 따로 하는 일도 있는데 시간 쪼개서 이 것 저 것 챙겨야 되고.”
“아, 네. 네. 그렇죠. 거기까지 말했죠.”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어설프지 않은’ 사람은 대개가 남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입을 대고 나서는 건 대개가 자신의 앞가림도 잘 못하는 어설픈 사람들이다. 지금 이 플로리스트처럼.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시다 보면, 아 내가 결혼 같은 거 괜히 하려고 했다 하는 생각이 드시는 것도 당연해요. 실제로 저희 샵에 오시는 다른 분들도 그런 분들 많으시고요. 세상에 스트레스 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그러니까 고, 아니 저, 다니엘 씨도 너무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많이 그런다고요?”


다니엘은 심술궂게 되물었다.


그럼, 박지훈 씨는 그런 사람들한테마나 이런 식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따위로 성의 없는 선택을 하면 안 된다 하고 잔소리를 했어요?”
“네?”


되묻는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아, 아니 저는.”
“아니에요.”


그러나 다니엘은 지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대답이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런 게 아니라뇨?”
“결혼 준비 스트레스? 아니. 난 별로 그럴 건수가 없어요. 결혼 준비는 걔 혼자 다 하고 있거든요. 난 아무 것도 안 하거든요. 이번에 꽃장식 고르는 거, 이게 거의 처음이거든요. 내가 도와준 결혼 준비가.”
“….”
“그런데 무슨 스트레스.”


그러게, 말하면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이번 결혼에 대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손품 발품을 팔아 이런 저런 것들을 준비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를 하면, 마지못해 웃는 얼굴로 고개나 끄덕이며 고생 많았네 하는 입에 발린 인사를 해 주는 정도의 선에서 늘 그쳤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일이 흘러가는 대로 몸만 맡기고 있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나 불편하고 불쾌해서 이런 떼를 쓰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다니엘은 선을 긋듯 그렇게 말했다.


“난 내가 그 친구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건지 어떤 건지를 모르겠어요.”


결혼하자는 말을 꺼낸 건 분명 자신이 먼저였다. 물론 그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프로포즈 안 할 거냐는 무언의 압박을 다니엘이 너무 빨리, 잘 눈치채버린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러나 그래놓고, 이 결혼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어 겉도는 자신의 모습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지없이 한심하기도 했다.


“난 내가 그 친구랑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건지를 모르겠다고.”
“….”
“말했잖아요.”


다니엘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뱉아내었다.


“난 내가 걔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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