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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열대야증후군熱帶夜症候群 4

-모히또











지훈은 30분쯤 후, 다니엘이 있는 바에 나타났다.

원래도 그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색이 연한 청바지에 품이 큰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꼴을 보니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낯선 곳에 처음 나타난 사람 특유의 표정으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지훈은 조심스레 다니엘의 옆에 와 섰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놓인 마티니 잔 위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걸 다니엘은 분명히 보았다.


“진짜 왔네.”


오라고 부른 건 자신이면서, 다니엘은 다분히 심술궂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아니, 저는.”
“앉아요.”


지훈은 우물쭈물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다니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연일 기상관측기록을 갱신하는 이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 손등까지 내려오는 긴 셔츠를 입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도, 지훈은 소매가 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문득 머리 위를 불어가는 에어콘 바람을 잊을 만큼 더워졌다. 그런 거, 안 더워요? 라고 물을 뻔 했다. 그와 자신이 어떤 용건으로 이 시간에, 여기 함께 앉아있는지를 기억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뭐 마실래요?”
“아, 저 술 못 마셔서.”
“안 독한 것도 많아요.”
“아뇨, 저 정말 술 잘 못 마셔요. 한 잔만 마셔도 얼굴 빨개지고.”


순간 애기네, 라고 말할 뻔 했다.

다니엘은 힘을 주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날이 덥고, 그 와중에 이 사람 때문에 억지로 묻어두고 있었던 ‘메리지 블루’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버린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래도 그다지 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모욕적인 언사를 할 마음은 없었다. 그건 별로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집에 와서 맹물 마시고 있을 건가?”
“그건 그렇지만.”
“여기요.”


다니엘은 더 이상 지훈의 말을 듣지 않고 바텐더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 모히또 한 잔요. 무알콜로.”


‘무알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훈의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라는 것들은, 숫컷이라는 것들은 대개 그 생각과 행동의 수준이 거기서 거기인 법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술이 약하다’는 것은, 그냥 지극히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특성일 뿐인데도 적지 않은 남자들은 그 지적을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옆에 앉아있는 이 곱상하게 생긴 남자 또한 그 덫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몇 분 후 지훈의 앞에는 애플민트 이파리를 곱게 얹은 모히또 한 잔이 놓여졌다. 지훈은 멀뚱한 표정으로 그 모히또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먹어봐요. 맛있으니까.”


물론 무알콜보다는 럼주가 들어간 편이 훨씬 낫긴 하지만.


“여기 바텐더 솜씨 좋아요.”


그 말에, 지훈은 마지못해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유심히 살폈지만, 알콜이 들어가지 않은 모히또는 그의 기대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카탈로그는 좀 보셨다고 했죠.”


이제야말로 퇴근 시간을 빼앗겨가며 여기까지 나온 값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지 지훈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곱상한 얼굴에 비해 그 음성은 나직했고, 제법 부드럽기도 했다.


“당신은 그게 직업이니까 알지 나 같은 보통 사람이 어떻게 아느냐고 그러셨는데, 네, 그 부분은 제가 확실히 좀 성급하게 접근했던 점도 있어요.”


일단, 지훈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달래는’ 것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람은 대개가, 뭔가에 돈을 지불한 상대와의 다툼에서는 어지간하면 지고 싶지 않아하는 성벽이 있게 마련이었으므로. ‘직원’인 지훈이 ‘고객’인 자신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그렇지만 고객님께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은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그건 진짜 제가 장담해요.”


아까부터 지훈이 하는 말이 어딘가가 자꾸 귀에 거슬린다 싶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고객님’이라는 호칭 때문인 것 같았다. 아까 분명히 이름을 말해줬는데. 당신과 나는 어디까지나 직원과 고객 사이일 뿐이라고 야멸치게 선을 긋는 듯한 그 태도는 어째서인지 점점 더 귀에 거슬렸다. 저렇게 애써 선을 그을 거라면, 왜 그 더운 날씨에 바깥까지 따라나와 기껏 해 놓은 남의 선택을 뒤집게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어떤 꽃을 봤을 때, 그게 예쁜가 안 예쁜가,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는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는 게 아니고요, 그냥 자신의 직관에 따르는 문제거든요.”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봤을 때, 예쁜가 예쁘지 않은가에 대한 감각을,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물론 이 꽃은 범상한 꽃이 아니라 결혼식에 쓸 꽃이니까, 꽃말이라든가 상징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한 플로리스트의 조언이 조금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그럭저럭 지훈의 말을 수긍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고객님이 결혼하실 분을 선택하신 것처럼요.”


그 말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다니엘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샤워를 하던 중 느닷없이 쏟아진 찬물 같았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보고서를 꾸역꾸역 쓰고 있던 중 느닷없는 정전으로 전원이 꺼져버린 데스크탑의 화면 같았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장나버린 에어콘 같았다. 그 느닷없음과, 당혹스러움과, 그에 따른 분노는 저도 모르게 다니엘의 표정을 굳어지게 했다.


“결혼할 사람을 선택한 것처럼.”


지훈의 말을 따라 외는 다니엘의 목소리는 흐릿하게 떨렸다. 방금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지훈은, 그런 다니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정말 모르겠네.”
“네?”
“난 모르겠거든.”


숨이 막혔다. 그제야, 요 며칠간 자신을 괴롭힌 감각이 더위가 아니라 질식감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깨달았다. 답답했다. 품이 맞지 않는 옷 속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는 느낌이었다. 등 뒤에서 덮쳐온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편하지 않은 자리에 불려가 잔뜩 먹고 온 느낌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내가 왜 걔랑 결혼해야 되는지를.”


여기서, 지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지극히 불안정한 침묵이 흘렀다. 다니엘은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고 지훈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런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둘 중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다문 두 사람 사이로, 오래된 재즈 피아노 선율이 떨어지는 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저, 저기.”


한참만에야 지훈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저는 그냥 꽃장식을 하는 사람이고, 결혼식을 전체적으로 코디네이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
“결혼을 앞둔 분들이, 그, 뭐라고 하지, 굉장히 막, 어, 그러니까, 인생이 끝날 것 같… 아, 아니, 이렇게까지 과격한 건 아니고, 그,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이게 옳은 선택인지, 그러니까, 우울해지는 그런….”
“그런 거 아닌데.”


중언부언 길어지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괴로웠고,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렇게 말해버렸다.


“메리지 블루 같은 속편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럼, 그게 무슨.”
“사랑 안해요.”


평생 가슴 속에 묻어둘 셈이었던 말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앞에서, 이렇게 불쑥 내뱉고 말았다.


“나 걔 사랑 안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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