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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열대야증후군熱帶夜症候群 3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까마득한 신입생 시절 어느 교양수업에서 강독한 ‘이방인’의 첫문장이 아마도 그랬던 것으로 다니엘은 기억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어지간히나 지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딱히 사실은 아니었다. ‘이방인’이라는 책 제목, 작가가 알베르 카뮈라는 것,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이 뫼르소였던지 하는 것 외에는,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거의 기억나는 바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태양이 너무나 뜨거워서’ 사람을 죽였다는 주인공의 일견 헛소리같은 말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런 날씨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히 해가 졌다. 이제 슬슬 밤을 향해 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후끈 달아오른 대기는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집에서 막 쫓겨나온 참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느닷없이 고장나버린 에어콘 때문에. 생각을 계속 하다가는 버럭 짜증이 날 것만 같아, 다니엘은 가끔 업무를 마치고 들러 혼자 칵테일을 마시던 칵테일 바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단은 그 시원한 공기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등으로, 허벅지로, 습하게 밴 땀이 차가운 공기에 일제히 식어 서늘해졌다. 이거지.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의 서울 날씨는 미쳐서, 동남아나 심지어 아프리카보다도 덥다고 한다. 그런 날씨에, 에어콘 없이 버티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게 맞았다.

다니엘은 늘 앉아버릇하던 자리에 앉아, 마티니 한 잔을 주문했다. ‘젓지 말고 흔들어서’ 같은 대사는, 이번에야말로 쳐보겠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곤 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엘은 투명한 마티니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포켓에서 꺼낸 지훈의 명함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연한 연두색, 그 위에 갈색으로 적힌 박지훈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 상호명까지. 손 끝으로 감촉해 본 종이의 재질은 조금 도톰한 편이었고, 심하지 않은 요철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니엘은 반쯤은 충동적으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양이 너무나 뜨거운 탓이었을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순순히 그것으로 그칠 생각이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 것도, 집 에어콘이 고장난 것도, 어느 것도 지훈의 책임은 아니었으므로. 지금의 이 전화가 다분히 화풀이성이라는 것은, 다니엘 스스로가 이미 느끼고 있었다. 화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지훈이 이 순간만을 잘 비껴가 준다면 이 서늘한 공기 아래 조금쯤 든 제정신이 두 번 세 번 전화까지는 하지 않게끔. 그렇게 자신을 다독여 줄 것을 다니엘은 믿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도 없는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요즘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반갑게 받는 사람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굳이 보이스 피싱이나 스팸 전화가 아니더라도,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온 전화가 반가운 내용인 경우는 그 자신을 돌아봐도 없다시피 했다. 그것은 대개 아쉬운 소리를 하려는 일가친척의 전화이거나, 시답잖은 일에 끌어들이려는 오래전 인연이 끊긴 동창 혹은 친구의 전화이거나 둘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지훈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강다니엘인데요.”


알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이름을 댔다. 누구인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네? 누구시라고요?]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손님과 직원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인 것을 빼더라도, 그가 상대하는 고객이 몇 명이나 될지 그런 건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어째서인지, 빈정이 상했다. 그렇게 쫓아나와 명함을 쥐어주고 돌아간 건 그 쪽이면서, 정작 전화를 하니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기, 몇 번에 거셨어요?]


이젠 숫제, 잘못 건 전화 취급을. 다니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미요.”
[네?]
“장미 있잖아요. 장미. 빨간 장미.”


자신을 ‘장미’라고 소개하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낯이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낯이 뜨거운 건 장미라는 꽃의 이름이 아니라 이 상황 자체일지도.


“이름이, 뭐래더라. 루즈 뭐였는데.”


여기서 그 장미 이름이라도 기억이 난다면 좀 덜 면구할 것도 같은데. 더위를 먹어서, 기억중추 자체가 망가지기라도 한 건가. 다니엘은 자신이 하는 말이, 마치 취객의 술주정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다.


[아.]


그러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지훈은 그 쯤에서 다니엘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루지 메이앙.]


정작 지훈의 입에서 나온 그 꽃의 이름은,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났다기에는 또 사뭇 별 것 아니어서, 그 점이 다니엘을 자존심 상하게 했다.


“네. 그거요.”


이제부터는 강짜를 좀 해 볼 생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다 그게 그것 같다고, 어차피 결혼식 하는 한 시간 남짓 쓰고 버릴 꽃장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사람을 이렇게 헷갈리게 만드냐고, 내 딴에도 오늘 할 중요한 일들을 미뤄놓고 일부러 짬내서 거기까지 간 건데, 당신 때문에 또 시간을 내야 하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지훈의 대답은 사뭇 엉뚱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을?]


그 말은 이상한 지점에서 다니엘의 심사를 긁어놓고 지나갔다.

그렇게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어놓고, 알지도 못하는 꽃 이름이 혀 끝에 맴맴 돌게 만들어놓고, 막상 전화하니 무슨 일로 전화했냐니. 지훈에게서 결혼식이란 일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훈계 아닌 훈계를 듣고 이 결혼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일로 연락했냐니.

그러니까, 그 명함도 결국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였나. 오늘 고른 그 장미 장식처럼.


“반대라며요. 장미 장식은.”


그래서 그 대답은 필요 이상으로 퉁명하게 나왔다.


“이 결혼, 당신이 해요?”
[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근데, 반대라며요.”


다니엘은 시비라도 걸 듯 물었다.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목에 핏대 세워 가면서 반대라고 하는데, 기분 나빠서 그 장식 쓰겠어요?”
[아, 그건.]


전화기 너머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생각은 좀 해보셨나요?]
“아니요.”


이건 설마, 진상이라도 피우는 건가.


“그 쪽이 떠맡긴 카탈로그 몇 번이나 봤는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 눈엔 다 그게 그것 같던데.”
[그게 그거라뇨. 엄연히 다 다른 꽃들인데요.]


여기서 처음으로, 울컥, 언성이 높아졌다.


[대충만 잡아도 장미도 있고 수국도 있고 백합도 있고… 달리아나 리시안서스도 있고요. 글라디올러스도….]
“그런 걸, 그쪽은 직업이니까 다 알지만, 나 같은 보통 남자가 어떻게 알아요.”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런 걸 이 시간에, 전화씩이나 해서 강짜를 부릴 일인가 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난 그냥 무난한 장미로 하려고 했는데, 그쪽 말 듣고 나니 장미 장식은 쓰기 싫어졌고, 그렇다고 다른 꽃이 뭐가 예쁜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
“나와서 설명이라도 좀 해 주든지.”


이게 다, 날씨가 너무 더운 탓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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